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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두맘 Oct 30. 2019

어쩌다 공무원이 되었다

지방 중소도시에서는 '공무원만 직장'이다

내가 ‘공무원’이 되었다고 했을 때, 친구들은 대부분 믿지 못했다. 증명사진이 박힌 공무원증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주고 나서야 친구들은 “경천동지할 일이네” “인생 전개 한 번 희한하네”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여 왔다. 그 정도로 공무원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친구들의 다음 반응은 “어쩌다?”였다.


그야말로 어쩌다 공무원이 되었다. 이는 내가 4년 전 내려와 살고 있는 지방 중소도시의 일자리 여건과 무관하지 않다. 서울에서는 단 한 번도 공무원을 꿈꿔본 적 없었고, 공무원을 만날 일조차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공무원만 직장”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공무원, 교사, 은행원 정도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화이트칼라 직장이 없는 게 팩트다.


열아홉에 서울에 올라가 8년을 살았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고 친구들을 사귀었고 추억이 담긴 장소들을 갖게 됐다. 좋은 교육을 받고 값진 기회들도 잡을 수 있었다. 서울 사람들은 세련됐고, 도시는 새롭고 멋진 것들로 가득했다. 서울은 달콤한 나의 도시였다.


모든 좋은 것들은 변하기 마련이다. 서울은 상한 우유처럼 팽창했다. 계속해서 인구가 늘었으며 끊임없이 붐볐다. 공기는 자욱했고 감당할 수 없이 비싸졌다. 갑갑한 미세먼지에 큰 숨 한 번 들이쉬지 못하던 어느 날, 나는 서울이 싫어졌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벗어나지 못한 학교 앞 보증금 없는 하숙집에서, 이제는 떠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나에게는 세상을 바꾸겠다는 거창한 의지 같은 게 없었고, 돈이나 성공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그저 삶을 갖고 싶었다.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는 평범한 삶을 갖고 싶었다. 서울에서 평범의 값은 너무 비쌌으므로, 나는 조금쯤 무턱대고 그곳을 떠났다.


별 연고도 없는 지방 도시에 내려와서 한 일 년은 빈둥거렸다. 아예 논 것은 아니고, 먹고 살 만큼만 일을 했다. 서울에서부터 해왔던 프리랜서 작가 일을 포함해 들어오는 대로 일을 했다. 일은 딱 먹고 살 만큼만 들어왔다. SNS 운영 대행을 하기도 하고 여행사에서 사업 운영을 맡아서 하기도 했다. 적게 벌고 적게 쓰는 라이프 스타일이 나와 잘 맞았다. 새로 생긴 스페인 음식점에 가서 인증샷을 찍어 오거나 유행하는 가방을 사지 않아도 좋았다. 돈은 없어도, 공공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을 수 있는 낮 시간이 생긴 게 기뻤다.


하지만 일 년이 넘어가자 ‘현타’가 왔다.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나이는 빠르게 서른 살을 향해 가고 있었고, 수입도 신분도 불안정했다. 프리랜서로 일을 하다 보니 이 지역 사람들을 만날 일도 별로 없었고, 뿌리가 없이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 계속 들었다. 서울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여기에 남아있어야 할 이유도 딱히 없어 보였다.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집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가족이 있으면 어떨까? 남자친구에게 결혼하자고 졸랐다. 남자친구는 그런 이유로는 결혼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지금은 남편이 되었다).


결국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 구직이었다. 궤도를 벗어나지 않는 진자처럼 매일 일정하게 출근하는 직장이 있으면 자리가 잡힐 것 같았다. 그런데 도무지 직장이 있어야 말이지. 대한민국의 여느 지방도시가 그렇듯이 변변한 일자리가 없을뿐더러 근무 여건이나 임금 수준도 박하기 짝이 없었다. 월 200만원 버는 일자리가 드물었다. 공무원은 전국 어디에서나 법으로 정해진 만큼의 급여를 받는다. 서울의 대기업 연봉에 비하면 쥐꼬리 같던 공무원 월급이 지방에서는 고소득이었다. 이 도시에서 나고 자란 젊은이들은 매우 자연스런 수순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고향을 떠나거나, 고향의 공무원이 되기 위한 시험을 준비한다.


“공무원만 직장”이라는 지방 도시에서 구직을 시작한 나도, 자연스레 공무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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