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공무원이 되었다
지방 중소도시에서는 '공무원만 직장'이다
내가 ‘공무원’이 되었다고 했을 때, 친구들은 대부분 믿지 못했다. 증명사진이 박힌 공무원증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주고 나서야 친구들은 “경천동지할 일이네” “인생 전개 한 번 희한하네”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여 왔다. 그 정도로 공무원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친구들의 다음 반응은 “어쩌다?”였다.
그야말로 어쩌다 공무원이 되었다. 이는 내가 4년 전 내려와 살고 있는 지방 중소도시의 일자리 여건과 무관하지 않다. 서울에서는 단 한 번도 공무원을 꿈꿔본 적 없었고, 공무원을 만날 일조차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공무원만 직장”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공무원, 교사, 은행원 정도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화이트칼라 직장이 없는 게 팩트다.
열아홉에 서울에 올라가 8년을 살았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고 친구들을 사귀었고 추억이 담긴 장소들을 갖게 됐다. 좋은 교육을 받고 값진 기회들도 잡을 수 있었다. 서울 사람들은 세련됐고, 도시는 새롭고 멋진 것들로 가득했다. 서울은 달콤한 나의 도시였다.
모든 좋은 것들은 변하기 마련이다. 서울은 상한 우유처럼 팽창했다. 계속해서 인구가 늘었으며 끊임없이 붐볐다. 공기는 자욱했고 감당할 수 없이 비싸졌다. 갑갑한 미세먼지에 큰 숨 한 번 들이쉬지 못하던 어느 날, 나는 서울이 싫어졌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벗어나지 못한 학교 앞 보증금 없는 하숙집에서, 이제는 떠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나에게는 세상을 바꾸겠다는 거창한 의지 같은 게 없었고, 돈이나 성공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그저 삶을 갖고 싶었다.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는 평범한 삶을 갖고 싶었다. 서울에서 평범의 값은 너무 비쌌으므로, 나는 조금쯤 무턱대고 그곳을 떠났다.
별 연고도 없는 지방 도시에 내려와서 한 일 년은 빈둥거렸다. 아예 논 것은 아니고, 먹고 살 만큼만 일을 했다. 서울에서부터 해왔던 프리랜서 작가 일을 포함해 들어오는 대로 일을 했다. 일은 딱 먹고 살 만큼만 들어왔다. SNS 운영 대행을 하기도 하고 여행사에서 사업 운영을 맡아서 하기도 했다. 적게 벌고 적게 쓰는 라이프 스타일이 나와 잘 맞았다. 새로 생긴 스페인 음식점에 가서 인증샷을 찍어 오거나 유행하는 가방을 사지 않아도 좋았다. 돈은 없어도, 공공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을 수 있는 낮 시간이 생긴 게 기뻤다.
하지만 일 년이 넘어가자 ‘현타’가 왔다.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나이는 빠르게 서른 살을 향해 가고 있었고, 수입도 신분도 불안정했다. 프리랜서로 일을 하다 보니 이 지역 사람들을 만날 일도 별로 없었고, 뿌리가 없이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 계속 들었다. 서울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여기에 남아있어야 할 이유도 딱히 없어 보였다.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집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가족이 있으면 어떨까? 남자친구에게 결혼하자고 졸랐다. 남자친구는 그런 이유로는 결혼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지금은 남편이 되었다).
결국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 구직이었다. 궤도를 벗어나지 않는 진자처럼 매일 일정하게 출근하는 직장이 있으면 자리가 잡힐 것 같았다. 그런데 도무지 직장이 있어야 말이지. 대한민국의 여느 지방도시가 그렇듯이 변변한 일자리가 없을뿐더러 근무 여건이나 임금 수준도 박하기 짝이 없었다. 월 200만원 버는 일자리가 드물었다. 공무원은 전국 어디에서나 법으로 정해진 만큼의 급여를 받는다. 서울의 대기업 연봉에 비하면 쥐꼬리 같던 공무원 월급이 지방에서는 고소득이었다. 이 도시에서 나고 자란 젊은이들은 매우 자연스런 수순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고향을 떠나거나, 고향의 공무원이 되기 위한 시험을 준비한다.
“공무원만 직장”이라는 지방 도시에서 구직을 시작한 나도, 자연스레 공무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