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작문의 기원

하얗게 멍든 종이

by 완다

언니 따라 책을 읽고는 있었지만 좀이 쑤셨다. 희끄무레한 종이 위에 검은 활자 투성이. 어떻게 익혔는지는 몰라도 또 글자는 알아서, 보기는 보되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건 별로 없었다. 그래도 나의 가족, 그들의 수준에 맞추려면 감수해야 할 고생이었다.


사실 ‘보는 것‘ 중에서는 하늘이 젤로 좋았다.

시시한 종이 더미 따위는 덮어두고, 구름을 가지고 이야기를 만들었다. 구름은 시시때때로 모였다 헤어졌다 하면서 매번 새로운 것을 보여주었고, 절대로 같은 것을 반복하지 않았다.


텔레비전에서 만화를 보는 것도 좋았다. 그냥 텔레비전 자체가 너무 좋았다.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이제는 혼자가 된 둥근 상 앞에 앉아 숙제도 하고 공부도 하였다.

밤늦게까지 화면 앞에 있는 날이 많아지자, 부모님은 여러 차례 혼을 내셨다. 그래도 막을 수 없자, 결국 거실에 놓여있던 텔레비전을 안방에 감춰놓고 출근할 때마다 문을 잠가버리셨다.


나는 텔레비전이 너무나 보고 싶은 나머지, 내 방 창밖 맞은편 아파트 옥상에 놓인 은색 환풍기 돌아가는 것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내 눈엔 그게 정말 텔레비전같이 보였다.

한참을 또 그렇게 이야기를 상상하며 쳐다보곤 했다.


그리고 또 뭐가 있었을까?

아, 어렸을 적 친구랑 인형 놀이할 때 "~라고 칠게"라고 상황극을 하며 마주 앉아 놀았던 기억이 나는가? 재미있는 것은, 각자 자기가 만들어놓은 설정에만 몰두해 상대 이야기는 듣는 둥 마는 둥 자기 이야기만 열심히 펼치며 놀았다는 것이다.



이처럼, 머릿속에서 그렇게 흘러가는 이야기를 붙잡아 종이 위에 옮기는 '글쓰기'라는 것은 아직 나에겐 생소한 것이었다. 그런 개념을 제대로 의식하게 된 건 아마도 일기 쓰기부터이지 않을까? 그래도 진지하게 생각한 적은 없었다. 학교 숙제로 매일 써내기는 하지만, 일기 자체도 뭔지 잘 몰라서, 한 번은 언니의 지나간 일기를 몰래 훔쳐보고 그걸 그럴듯하게 베껴 써내게 되었다.


그때 본 건, 피아노 연습을 했다는 내용의 그림일기였다. 직사각형 피아노를 바라보며 앉은 뒷모습을 그리고, 만화처럼 공중에 물결표시를 그린 뒤에 음표를 그려놓아 음악이 흐르는 듯 표현한 그림이었다.


이것이 내게는 너무 신박하게 느껴져서, 그대로는 아니지만 조금씩 바꿔 따라 썼다. 그래도 단어 순서나 조금 바꾸는 정도였지만 말이다. ‘창작’이나 ‘표절’이 뭔지는 이미 좀 알았다 하지 않았는가.


오히려 내가 심혈을 기울이던 부분은 피아노 덮개를 ‘원본보다 얼마나 더’ 이쁘게 그리느냐였다. 우연히 체크무늬를 다른 색으로 교차해서 그리면 너무 이쁘다는 것을 발견한 뒤부터다.

매일 같은 내용을 쓰는 것은 아무래도 좀 그러니까 사나흘에 한 번 꼴은 그걸 그리는 것이다.

내가 피아노 연습을 그렇게 좋아할 리도, 또 우리 집 피아노 덮개가 그리 많을 리도 만무한데, 허구한 날 새로운 체크 문양의 덮개를 덮은 피아노를 치고 앉아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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