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얗게 멍든 종이
한 번은 매우 놀라운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한창 동화책을 읽던,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의 일이다.
그날도 아빠를 따라 언니와 함께 동네 단골 서점에 갔다. 내가 즐겨 읽던 동화책은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평상 위에 놓여 있었고, 나는 그 사각 진열대를 몇 번이고 빙글빙글 돌았다. 마음에 드는 책을 고르기 위해서.
그때 노란 태양과 노란 해바라기가 그려진 멋진 책을 발견했다. 지금도 노란색을 좋아하는 편인데, 그때는 어린아이의 상징과 같은 그 색을 참 좋아했더랬다.
나는 서둘러 그 책을 집어 들고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기 시작했다.
...
(책장을 덮는다.)
갑자기 내 심장이 쿵쾅쿵쾅거렸다.
‘내가 생각했던 내용인데, 누가 먼저 책으로 만들었지?‘
정말이었다. 데자뷔 현상도 아닌데.
반가움보다는 아쉬움이 앞섰다. 이제 이 그림, 이 이야기로는 더 이상 누구도 책을 낼 수가 없겠구나. 사실 그 누구를 가리키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었지만.
그때 느낀 얼굴이 달아오를 만큼 강렬한 기운은 무엇이었을까. 어렴풋이 ‘창작‘이란 것에 대한 명료한 인식이 생겨났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또 ‘표절‘이라는, 단어 자체는 모르지만, 그 개념까지도.
세상에 어쩌면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오랜 세월에 걸쳐, 이 너른 세상의 어느 곳에서는 내가 하고 있는 생각을 누군가는 분명히 또 했을 거라는 생각에 낭패감마저 느꼈다.
참 신기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