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얗게 멍든 종이
내가 반드시 작가가 되어야 할 이유가 있나.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그런데 이 일만이 천직인 것처럼, 어쩌면 소명인 것처럼 느껴져 매일같이 마음에 부담을 지고 살고 있다.
도대체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충격이다. 이렇게 쉬운데...
내 마음을 털어놓은 게 거의 처음이다. 단순한 네 문장을 말하기까지 한 문장당 각각 십 년 남짓한 세월이 흐른 것 같다.
이런 식으로 말을 해버리면 세상이 무너질 줄 알았다.
지구가 아니라, 내가 구축해 놓은 ‘나만의 세상’이 말이다.
그 구조물이 붕괴되면, 나는 그 잔해 속에 깔려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믿었다. 그렇게 희망 없는 삶이 불러올 비극적 결말이 두려웠다.
휴.. 이렇게 말하는 순간, 오히려 어깨가 가볍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던 모자 장수처럼, “나는 그렇게까지 진솔하게 작가가 되고 싶지는 않아. ”라고 비로소 외친다.
그래서 책을 많이 팔거나 명성을 얻기보다는, 어서 작가가 되어버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얼른 전자도서를 만들었던 이유도 있다.
다행히도, 내 데뷔작이 세상이 뒤흔드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누드 자화상보다 차라리 더 창피한 자전적 소설은 그렇게 소리 소문 없이, 검색 순위에서 하루하루 밀려 내려가는 중이다.
어쩌면 나에게는 글의 나라 입국 만이 중요했고, 국적 취득만이 목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도 모르게 그 국적을 취득했다.
내가 글쓰기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매우 불분명하다. 이것만 봐도 내 꿈이 ’ 작가‘가 아니라는 게 확인된다.
어렸을 때를 회상해 보면, 나는 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게 그냥 좋았고, 무엇보다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