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장마

하얗게 멍든 종이

by 완다

드디어 서울에서의 대학생활이 시작되었다. 하얀 겨울로부터였다.

우리는 신림동의 방 두 칸짜리 아파트에서 같이 지내기로 되어있었다. 모든 것이 구비되어 있어 몸만 들어가면 되는, 아기자기한 신혼집 같았다. 부모님의 정말 크나큰 배려였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우리는 서로를 무시하며 말도 거의 섞지 않고 지내던 사이였다. 그런데 언니가 대학생이 되어 집에 돌아왔을 때는, 갑자기 어른이 된 듯했고 나에게도 친절하게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나는 나대로 서울로 올라오며 내심 곁에서 언니의 ‘사법 고시뒷바라지’를 해주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부모님의 생각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저런 계획이 무색하게도, 그 집에는 나 혼자만 남게 되었다.


언니는 거의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무렵 신앙생활에 아주 열심이여서 교회 동아리 활동으로 매우 바빴다.


어렸을 때, 우리는 주일이면 엄마에게 혼나며 꾸역꾸역 교회 유년부에 끌려나갔다. 엄마는 교회에 나가는 것을 반대하던 아빠와도 엄청 싸우셨다. 그러다 결국 엄마 본인도, 그리고 언니도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나만이 중학교 2학년 때 그 미술로 예고에 진학했다던 친구를 따라 다시 교회에 나간 후로 쭉 신앙생활을 해왔다.


그런데, 언니가 이제는 나보다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더 이상 학업이나 진로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였다.

부모님도 나도 언니가 그동안 서울에서 혼자 어떻게 지내는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몰랐던 것이다.

그렇게 달라진 언니의 모습을 보고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는 한순간에 혼란에 빠졌다. 사실은 우리 가족 모두가 그랬다.

나는 이 혼란의 이유가, 나 역시도 언니 한 사람 만을 바라보고 살아온 탓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어설프게도 잘못된 해법을 찾아가게 되었다.

정말 일차원적으로, 원래의 내 목표를 다시 찾아와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려면 원하던 대학, 원하던 학과로 다시 들어가는 길만이 유일한 답이었다.


나는 학교에 일단 등록만 하고, 한 학기만 대충 다닌 뒤 곧바로 휴학계를 냈다. 그리고 반수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자신이 있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는 제대로 공부해 본 적이 없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 유명한 영어 문법책, 수학공식책을 1독도 해보지도 못했던 나니까, 이번에 제대로 각 잡고 하기만 하면, 언니만큼은 아니더라도 목표한 곳에는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 날, 좀처럼 집에 오지 않던 언니가 찾아와,

“네 문제가 정말 그것 때문이 맞을까?”

라고 정곡을 찌르기 전까지는.

언니는 이미 나보다 2년 앞서 원하던 곳에 들어가지 못해 좌절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언니의 단 한마디의 말은 세상 그 어떤 누구의 것보다 내게 무거운 무게로 느껴졌던 때였다.

그 한 마디의 말이 나의 억눌러온 무의식 세계, 어둡고 끝없는 심연 한가운데 떨어져 큰 파문을 일으키고 말았다.


그 후로 내 안에는 서울의 긴 장마가 시작되었다.

고향에서의 한 철 지나가는 소나기처럼 시원하고 청량하게 정화되던 감정은 사라지고, 눅눅하고 꿉꿉한 우울한 날들이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게 그렇게 몇 해를 이어갔다.


재수는 실패로 끝났다.

나는 원래의 학교로 돌아왔다.


나는 실의에 빠졌다. 심지어 남은 전세 기간 1년 동안 신림동과 관련 없는 나만 엉뚱하게 멀리 대현동까지 통학을 했다. 내가 살림을 맡겠다고 호기롭게 이야기했었는데 나중에는 냉장고며 생활용품이며 텅텅 비어있기 일쑤였고, 그 돈은 거의 택시비로 탕진했던 것 같다. 부모님이 가끔 상경하셔서 집안 꼴을 보시고는 어찌 된 영문도 모른 채 내가 고의적으로 그 돈을 다 횡령한 것처럼 생각하셨다.


결국, 언니랑은 이제 아예 '방'을 따로 구해서 찢어졌다. 굳이 그런 ‘집’이 우리에게는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훗날 부모님은 이 일로 인해 엄청 상심하셨다고 했다.

학창 시절에도 남남처럼 지내왔는데, 자매라는 이유만으로 한 공간에 붙여놓는다고 해서 갑작스럽게 잘 지낼 턱이 없다. 그런데도 왜 그때는 부모님이나 나나 그걸 당연하게 또 쉽게 생각했을까. 지금에 와서 보니 실웃음이 나온다.


처음에 나는 학교 근처에 하숙집을 구했다. 이제 내 삶의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언니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그리고 정신마저 완전히 놓았다.

삶의 목표, 목적, 살아가야 할 이유까지 한꺼번에 잃어버리고 말았다.

나조차 스스로를 언니의 부속물로 생각해 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늘 나를 괴롭혔던 문제, 나는 왜 태어났으며, 왜 버림받았는지에 수없이 걸려 넘어졌다.


문학 속에서는 답을 찾을 수 없다고 느꼈고, 종교와 더불어, 이제는 새롭게 철학으로까지 눈을 돌렸다. 나는 전공인 국문과 수업은 거의 듣지 않고 졸업 최소 학점만 채우기로 했다. 국문학은 그저 글을 잘 쓰는 기술만 가르쳐줄 뿐이지, 그 내용을 채울 수 있는 것은 경험, 학문에서는 사유, 즉 종교와 철학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학교에서 철학을 부전공을 택하여 전공보다 어쩌면 더 많은 수업을 들었다. 그 밖에 오로지 나의 즐거움을 위한 학문으로 미술사학을 택하여 나머지 학점을 마저 채웠다.


같은 국문과 친구들은 취업, 대학원 진학, 유학이나 임용고시 등을 준비하며 차근차근 학점을 쌓아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들이 하등 중요해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당장 죽느냐 사느냐가 문제였다. 눈을 뜨면 하루 살아갈 이유를 찾아서 겨우 죽지 않고 밤에 간신히 눈을 감는 형편이었다. 출석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한편, 이런 방황과 고난은 작가, 특히 예술가로서 살아가기 위한 호된 신고식이라고 은근히 생각했던 면도 있다

마침 우리가 수업을 듣던 건물은 천재이자 기인으로 알려진 작가 이상이 설계했다는 잘못된 전설이 돌았던, 들어갈 때와 나올 때 층수가 혼동이 되는 매우 특이한 곳이었다. 나는 그 안을 헤매며 요절한 기형도 시인이나 김유정 작가, 전혜린 작가, 또는 일제 치하에 죽음을 맞이한 윤동주 시인, 이육사 시인과 같은 분들처럼 모름지기 작가란 삶을 태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IMF의 터널을 통과한 선배님들의 경험을 들으며 모두들 바짝 긴장한 채 학점 관리, 어학 시험, 아르바이트나 인턴 연수 등 스펙 관리에 지금 못지않게 신경 쓰기 시작했을 때였다.


아무리 작가 지망생이라도 하더라도 그쯤이면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렸어야 했는데, 유독 좋은 리포트 점수가 문제였다. 아무래도 또래보다는 조금 더 많이 읽은 독서량과 철학 수업으로 얻은 잔지식이 좀 통했던 모양이다.

심한 방황으로 무너지고 있는 현실 속에서도 언제든지 내가 정신만 차리면, 그래서 글을 써서 세상에 내놓기만 하면, 작가로 데뷔하자마자 승승장구하고 유명해질 거라는 못된 교만과 허황된 망상에 부풀었다.


잔재주가 좀 있었던 나는 그때 개인 홈페이지를 직접 만들었다. 지금처럼 인스타나 페이스북 등 SNS, 그보다 더 이전에 있었던 싸이월드의 플랫폼이 갖춰지기 전이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틈틈이 알렸다.

거기에 드디어 단편 소설, 아니 메모장 한 바닥만큼의 극히 짧은 콩트(conte)를 종종 올리기 시작했다. 일기장이 아닌 좀 더 개방적인 곳에 꾸준히 글을 게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만 해도 아직 희망이 있었다.

예술가들이란 훌륭한 성적표, 우등상과는 무관한 것이었으니까.

나는 종종 누드 자화상을 그리기도 했다.

혼자 사는 자유를 통해 나름 예술가다운 삶을 만끽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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