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다'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일방향적인 의미를 지닌다.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행위'라는 것이 여행하는 주체인 여행자가 일방적으로 목적지를 선택하고 그곳에서 자신이 원하는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여행자가 여행을 가기 전에 숙소, 맛집, 다양한 활동 후기들을 검색하면서 정보를 파악하는 것과 달리 여행의 목적지로서 선택받은 '그곳'은 여행자를 파악하고 그에 맞는 준비를 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러다 보니 여행지에서 우리는 쉽게 익명성을 보장받는다. 목적지로서 '그곳'의 입장에서는 '그곳'을 스쳐 지나가는, 누군지 기억에 남지도 않는 수많은 여행자 중 한 명으로.
그러나 여행의 경험이 쌓일수록 여행지에서 마주치는 사람들과 교류한 기억이 소중하게 남았다. 일상생활에서 나를 옭아매던 이름표를 떼어버리고 자유를 만끽하다가도 정말 우연히, 그곳에서 살거나 머무는 사람들과 말문을 트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처음에는 주인과 대화를 나누던 것이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손님들까지 번져서 어느새 가게 안에 있던 사람들이 함께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기억도 있었다. 그럴 때면 먼저 나서서 인터넷으로는 알아낼 수 없는 맛집을 알려주기도 하고 좋아하는 안주를 나눠먹기도 했다. 언어가 통하지 않을 때면 꼭 한 명쯤 영어를 할 줄 아는 이가 있어서 통역을 해주시거나 바디랭귀지와 번역기를 사용해서 대화를 주고받았다.
물론 현지뽕일 수도 있다. 어.....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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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부터 여행을 가면 꼭 챙겨 다니는 아이템이 있다. 몇 년 전 일본 여행에서 동전을 넣고 돌려서 상품을 얻는 뽑기를 했는데 컵 위에 꽂을 수 있는 귀여운 인형이 나왔다. 하나를 열어보고 마음에 들어서 우르르 여러 개를 뽑아왔다. 부피는 작지만 여행을 가서 컵을 사용하는 곳에서는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어서 편리하고 '여행하는 나'를 대신해서 사진으로 남겨 놓으면 좋은 추억이 될 것 같았다.
이런 아이들도 있고(오른쪽이 확대된 사진)
이런 아이도 있고(최애템)
이런 아이들도 있어요
그런데 이것이 우리에게만 재미있는 것이 아니라 현지인들에게도 인상적인 것이었나 보다. 치앙마이에 도착한 지 이틀째 저녁, '럿 롯'이라는 유명한 맛집을 방문했다. 올드타운 내에서 생선구이부터 똠얌까지 대표적인 태국 음식들을 맛볼 수 있는 곳이었다. 먼저 나온 쏨땀을 한 입 먹었는데 지금까지 먹어본 쏨땀 중에 가장 맛있어서 신이 났다. 얼른 인형들을 꺼내 컵 위에 꽂아놓고 사진을 찍으면서 신나는 기분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곁을 오가던 직원이 인형을 발견하고 너무 귀엽다고, 구경을 해도 되냐고 물었다. 흔쾌히 그러라고 하는데 주변 사람들을 불러 모아 함께 구경을 한다.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물어서 얼마든지 괜찮다고. 역시 만국 공통 귀여운 것이 최고다.
비슷한 경험을 다른 식당에서도 할 수 있었다. '반 반'이라는 조금 더 힙한(?) 식당에서는 직원 여러 명이 조심스럽게 다가오더니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물었다. 사진을 찍어서 페이스북에 올리고 싶다고. 옆에 있던 직원들은 인형을 가리키며 한국어로 '귀.엽.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말을 듣고 우리는 태국어로 '귀엽다'를 뭐라고 말하는지 물어봤고(태국어로는 '나락'이라고 한다) 서로의 언어에서 알고 있는 단어들을 주고 받았다. 재미 삼아 챙겨 온 것들이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에게도 추억이 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게다가 우리가 기억될 수 있는 포인트이기도 했다. 시간이 흐른 뒤 이곳을 다시 방문한다면 우리의 얼굴보다 이 인형들을 기억할 확률이 높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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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비슷한 경험들은 다른 여행지에서도 있었다. 우리가 누구인지 궁금하지도 않고 기억에 남지도 않는 '지나가는 사람'으로 바라보는 눈빛이 바뀌는 경험을 하고 나니 여행을 떠나기 전에 미리 준비를 하게 되었다. 여행지에서 좋은 인연을 만나게 되면 건네주고 싶은 아이템들을 한국에서 미리 챙겨가는 것이다. 받는 사람에게 부담을 주면 안 되니까 너무 비싼 것도 안 된다. 적당하게 저렴하면서도 실용적인, 기억에 남을 만한 아이템이 무엇이 있을지 여러 날 고민했다.
이번 여행에서 챙긴 것은 라이언 부채와 마스크팩, 그리고전장김 여러 장. 여러 개 묶음으로 구입해서 하나당 1000원 내외 정도의 저렴한 가격에 기억에 남을 만한 귀여움 또는 실용성을 갖춘 것으로 골랐다. 게스트하우스와 호텔에서 만나 인연이 된 스탭들과 친구들, 단골집처럼 다녔던 식당에 조금씩 나눠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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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앙마이 한 달 살기를 결심하기 몇 달 전, 4박 5일 정도로 짧게 치앙마이를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 여행을 통해서 치앙마이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욕망을 갖게 되었고 돌아보면 그것이 한 달 살기의 사전답사가 된 여행이었다. 그때 머물렀던 호텔에서 너무나 친절한 직원 '쏜'을 알게 되었다. 당시 우리가 머물던 방에 문제가 있었는데 쏜이 그것을 해결해주었고 그곳에서 머무는 동안 한결같은 친절함이 인상적이었다. 태국은 미소의 나라다, 태국 사람들은 친절하다, 그런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마음에서 우러나는 친절함을 경험하는 것은 어디서나 특별한 일이다.
떠나기 전날 한국에서 사 온 캐릭터 볼펜을 선물로 건넸다. 별 건 아니지만 한국에서 가져온 조그만 선물이에요. 사실 쏜이 영어를 완벽하게 하는 것은 아니었고 우리도 태국어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가 나눈 대화는 정말 짧은 영어 단어('present' 정도?)와 바디랭귀지(감사하다는 손짓과 마음에서 주고 싶다는 손짓) 정도가 전부였다. 하지만 쏜도 우리도 서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을 충분히 이해한 것 같았다.
이번에 치앙마이 한 달 살기를 계획하면서 마지막 숙소를 그곳으로 정했다. 지난번에 묵었을 때 너무 좋았던 기억 때문이기도 했고 내가 아는 곳을 한 번 더 가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몇 달 만에 다시 방문한 그곳 스탭들은 우리를 기억하며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숙소를 이용할 때 기억해야 될 내용들을 설명해 주는데 'I know, I know,' 하면서 웃었더니 깜짝 놀라며 되묻는다. 날 기억해? 당연히 기억하지, 우리는 여기가 좋아서 다시 온 건데. (씨익)
저녁을 먹고 와서 스탭들이 바뀔 때쯤 짝꿍이 1층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쏜이 야간 스탭이었는데 아직도 그대로인지 궁금하다고. 그렇게 내려간 그는 한 시간이 지나도 올라오지 않았다. 아니, 간단히 인사만 하고 오겠다더니 왜 감감무소식인가? 알고 보니 그를 다시 본 것이 너무나 반가웠던 쏜과 위챠(호텔 주인)이 맥주를 권하며 그를 놓아주지 않아 1층 공용 공간 테이블에 둘러앉아 본격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단다. 게다가 우리가 그곳을 다시 찾아온 것이 거의 두 달 만이었는데 그 사이 쏜은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단다!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마음이라고,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의 정반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외국 여행을 할 때 누릴 수 있는 익명성에 기대 자유를 느끼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내가 기억되기를 바란다. 나의 경험이 혼자만의 경험에서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고 공유하고 싶다. 벽에 걸려 있는 아름다운 그림 속에 나 혼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숨 쉬고 대화하고 싶다. 이런 마음에 공감하는 분들은 여행지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내가 어떻게 기억될 수 있을지 고민해보면 좋을 것 같다.
'여행하다'라는 단어가 주체와 대상, 동작이 향하는 방향이 확실한 단어라면 '나누다'나 '주고받다', '통하다'나 '섞이다'처럼 다른 주체와 함께 하는 행동이라는 의미가 기본적으로 내포된 단어들도 있다. 여행을 '하는' 것에서 여행을 '나누는' 것으로 변하는 순간은 생각보다 쉽게 찾아온다. 같은 여행지, 같은 숙소를 선택한 다른 여행자들과 함께 하는 것일 수도 있고, 같은 시간에 그곳에 함께 존재하는 이들과 공유하는 것일 수도 있다. 게스트하우스에 비치된 방명록에 우리가 정말 좋아했던 식당들을 소개하는 글을 남기고, 한국에서 준비한 귀여운 기념품을 선물하는 것. 그곳을 찾아갈 다른 이들을 위해 경험을 후기로 남기고 추억을 담은 여행기를 쓰는 것. 조금 더 입체적인 여행을 만드는 것은 이렇게 사소한 순간들에서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