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치앙마이 한 달 살기에 관해 자료를 찾아보면 콘도를 렌트하는 방법이 가장 많이 나온다. 치앙마이 한 달 살기를 결심하고 가장 먼저 고민한 것이 숙소를 어디로 할 것인가였는데, 실제로 찾아보니 치앙마이에는 안전한 보안과 편리한 시설을 갖춘 완벽히 현대적인 콘토들이 많이 있었다. 치앙마이에서 2, 3일을 머무르면서 부동산 중개인과 함께 매물을 둘러보고 장기 렌트를 하는 분들도 있었다. 한 달 이상의 장기 렌트를 할 경우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신축 풀옵션 스튜디오, 레지던스 시설급의 콘도를 월 30-40만 원 정도의 저렴한 가격에 이용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했다.
장기 렌트냐 게스트하우스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러나 우리는 숙소비를 조금 더 지출하더라도 다양한 숙소를 경험하고 싶었다. 콘도에서 지낼 경우 가장 아쉬운 부분이 숙소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다른 사람들, 특히 다양한 국적의 다른 여행자와 현지인들과 마주칠 기회가 없어진다는 것. 혼자만의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거나 일을 하는 독립 공간이 반드시 필요한 경우라면 모르겠지만 우리는 개인적인 공간을 존중받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 교류하고 싶었다. 적당한 거리감과 적당한 소속감을 동시에 느끼기에는 게스트하우스 생활이 적격이라고 생각했다.
반 하트 타이 게스트하우스에서 머문 2주일 동안 우리는 그곳의 터줏대감이 되었다. (우리보다 먼저 그곳에 있었고 우리가 나갈 때까지 그곳을 떠나지 않은 인물은 딱 한 명이었고 그녀는 결국 치앙마이에서 직장을 구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루에서 3일 정도를 이곳에서 묵고 다른 곳으로 떠나는 것과 달리 우리는 '반드시 이것을 해야 해!' 하고 정해놓은 스케줄이 없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으러 나가고 날씨가 좋으면 바깥 구경을 가고 잠이 오면 자는 우리의 일상은 길 건너에 살던 고양이 우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많은 시간을 게스트하우스 1층 공용 공간에서 보내면서 이곳에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과 자주 마주쳤다. 대부분의 경우 'Hello,' 또는 'Hi,' 하고 간단히 인사를 나누는 것이 전부였다. 인사를 나누면서 우리는 자연스레 방금 인사를 나눈 사람들이 어느 나라 사람이고 어떤 이유로 치앙마이를 방문했을지 추측했다. 저분은 왠지 영국식 악센트를 쓰네. 저분은 우리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언어를 사용하셔. 저분은 딱 봐도 배낭여행 고수인 듯? 어떤 사연으로 치앙마이, 그리고 이곳에 왔는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재미가 있었다.
어색한 인사가 쌓여서 시작되는 긴 대화들
Anyway, what's your name?
여행을 하면서 통성명을 하는 경우가 몇 번이나 찾아올까? 치앙마이 한 달 살기가 지나고 나서 돌아보니 게스트하우스에서 2주일을 머물면서 통성명을 한 경우는 딱 두 번이었다. 그것도 두 번 다, 즐거운 대화를 한참 동안 나누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기 직전에 '그러고 보니 우리 아직 이름도 모르네. 내 이름은 OO야, 네 이름이 뭐니?'하고 물어서 알게 되었다. 두 번을 제외하고는 가벼운 스몰토크를 나눈 뒤 다음에 또 보길 기약하며 헤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새벽 2시가 넘는 시간까지 딥토크를 이어갔던 Subi는 우리 이름을 듣자마자 난색을 표했다. 아무래도 나 기억 못 할 것 같아, 라며 울상을 짓던 Subi에게 괜찮아, 괜찮아. 나도 네 이름 까먹을지도 몰라, 라고 말하며 웃었던 것은 농담이 아니었다. 나도 분명히 통성명을 했던 나머지 한 번은 이름이 기억나질 않는 걸. 어떤 대화를 나눴고 어떤 음식을 나눠 먹으면서 어떤 타이밍에 웃었는지 모든 것이 생생한데 마지막 순간에 나눈 이름은 기억나질 않는다. 미안해요, 호주에서 온 친구들이여....
낯선 소리가 연결된 단어를 누군가의 고유한 이름으로 기억하려면 나름의 노력이 필요하다. 나도 Subi라는 이름을 잊지 않기 위해서 그녀가 하고 있던 루비색 머리띠를 바라보면서 마음속으로 '루비, 수비,'를 몇 번이고 되뇌었다. 며칠 뒤 Subi와 나눈 이야기를 글로 쓰면서, 즉 어딘가에 기록을 남기고서야 그녀의 이름을 확실하게 기억하게 되었다.
우리는 모르는 곳에서 쉽게 모르는 사람이 된다
치앙마이에서 한 달 살기를 하면서 나는 익명성의 달콤함을 즐겼다. 기억되지 않는 자유를 만끽한 것. 이곳에서 나는 대한민국 서울시 어디에 살고 어떤 일을 하고 어떤 가정에 어떤 역할을 하는 누구라는 정체성으로부터 자유로웠다. 대부분의 경우 그냥 아시아인,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한국 사람' 정도로만 인식되었다. 다행히도 K-Pop과 K-Beauty, 그리고 매운맛으로 대표되는 한국 음식들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유명한 콘텐츠들이 한국의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치앙마이에 잠시 방문해 곧 떠날 사람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나도 타인의 눈치를 보는 일이 줄어들고 다른 사람들도 나를 금방 잊는다. 그중에서도 외형적으로 나를 드러내는 면에서 가장 자유로워지는데, 한국에서는 시도해보지 않았던 스타일의 옷과 헤어, 화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시도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그것이 나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이 되어 있다. 사실 나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을 찾는 가장 좋은 방법은 충분한 시행착오를 경험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주변의 눈치, 유행하는 스타일을 신경 쓰다 보면 충분한 시행착오를 겪기가 힘들다. 결국 나에게 어울리는 것과 어울리지 않는 것을 파악할 새도 없이 안전한 유행을 따라가게 된다.
하지만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행위는 익명성을 보장한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없고, 나에게 어떤 기대와 요구를 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해방감을 느낀다. 나 또한 마찬가지. 인천공항에서 비행기가 속력을 내면서 활주로에서 날아오르기 시작할 때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규정짓는 것들을 모두 그곳에 놓고 날아오르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