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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매 Oct 07. 2024

오트쿠키

오트쿠키야 행복해!

사촌동생의 티푸드


주말에 사촌동생 집에 놀러 갔다. 동생과는 지하철 같은 라인 사이에 몇 개의 역을 두고 가까이 살지만 좀처럼 자주 보지 못했다. 뭐 좀 물어보려 오랜만에 연락을 했는데 "언니, 우리 집에 티타임 하러 올래?"라는 사촌동생의 말에 바로 약속을 잡았다.

몸이 좀 아팠던 사촌동생과 역시 여기저기 아픈 곳이 생기다 보니 자연스레 건강에 관심이 많아진 나는 평소 '건강한 음식'이라는 공통의 주제로 통하는 사이였다.

동생은 나무 도마 위에 당근, 오이, 적양배추, 사과, 방울토마토, 오렌지를 정갈하게 썰어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전 영국 여행을 다녀온 사촌 동생은 마지막 날 오가닉마켓을 털어왔고 거기서 사 온 것을 나와 같이 나눠먹고 싶어서 불렀다고 했다.


신선한 과일, 야채와 곁들여 영국에서 온 트러플 마요네즈, 디종 머스터드, 자두잼, 크림치즈, 오트 100% 쿠키, 디카페인 홍차가 내어졌다. 우리끼리 우스갯소리로 "이런 풀떼기 우리나 좋아하지 남들은 이런 걸 먹으라고 한다고 깜짝 놀랄 거야."라고 깔깔 웃어댔다. 그러면서도 '나에게 이렇게 건강하고 사려 깊은 티타임을 선사해 준 사람이 있었나?'생각해 보니 정말 처음이었다. 캐리어 공간도 부족하고, 환율도 비싸 정말 먹고 싶은 것만 한 개씩 골라서 사 왔을 텐데 그 소중한걸 나한테 내어줬구나. 새삼 사촌동생의 따뜻한 마음에 감동이 밀려왔다.


"언니 코펜하겐에 갔더니 사람들이 다 인간 cos야. 다 키 크고 멋진데 꾸안꾸라 로고가 박힌 옷이 하나도 없더라. 코펜하겐 식당에서 뭘 시키면 기본적으로 양이 너무 적어. 그래서 사람들이 마르고 나이 든 사람도 배가 하나도 안 나왔나 싶어. 앞으로 내 추구미는 코펜하겐이야." 누가 봐도 한국인스러운 얘기를 나누며 우리는 열심히 당근을 씹었다.


사촌동생은 에든버러의 한 성당에서 같이 간 남자친구에게 눈물의 프러포즈를 받았다고 했다. 나도 모르게 "축복해"라는 종교인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평소에 잘 쓰지도 않는 말인데 그 당시나의 진심을 한껏 담아낸 말이었다. 나의 말에 사촌동생은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이윽고 내 마음이 전달되었는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날 먹은 오트 100% 쿠키는 밀가루가 들어가지 않아 속이 편안했다. 또 자극적인 양념이 잼을 발라 먹어도, 트러플 마요네즈를 얹어 먹어도 튀지 않고 그것들을 쳐줬다. 아무 권위나 공신력도 없는 이 몇 글자 글로 축복하노니, 남을 배려하고 챙겨주는 게 익숙한 이 오트쿠키 같은 사촌동생이, 뉴욕, 파리가 아니라 고작 코펜하겐이 추구미인 이 소박한 인간이 아주 많이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오트쿠키야 행복해! 그리고 축복해!


행복한 오트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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