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호박이 아니고 밤호박이다.(단호박!) 작년 여름 아빠가 밤호박 농사를 짓는 지인이 있다며 밤호박 몇 박스를 사서우리 집에 보내주었다. 밤호박은 단호박과 달리 호박보다는 밤, 고구마에 가까운 맛이 난다. 그래서 그냥 쪄먹기만 해도 맛있고 요리를 해 먹어도 고유의 단맛이 풍미를 자아낸다.
올해도 작년에 먹은 밤호박이 그리워 언제 나오나 궁금해질 때쯤 아빠가 또 밤호박을 보내주었다.덕분에 나는 올여름을 밤호박을 쪄먹기도 하고 꿀과 견과류에 버무려 먹고 수프를 만들어 먹기도 하며 밤호박이 하나하나 없어지는 걸 아쉬워하면서 보냈다.
유튜브에서 '100번 넘게 만든 단호박 수프' 영상을 보고 만든 밤호박수프를 가족들에게 대접했을 땐 정말 네가 만든 게 맞냐며 기분 좋은 의심을 받기도 했다. 나도 그 레시피로 7번은 만들어 먹었으니 언젠가 100번은 채울 테지.
고구마가 유명한 해남에서 밤호박은 새로운 특산물이 되었다고 한다. 해남은 달콤한 구황작물이 잘 자라는 비결이 숨겨진 마법의 땅인가 싶다. 밤호박이 궁금해진 나는 인터넷 검색을 했는데 밤호박은 하우스에서 공중재배로 자라는 새로운 특화작물로 여름에만 맛볼 수 있다고 한다. 하늘에 주렁주렁 열린 밤호박 사진을 보니 파인애플이 두툼한 줄기에서 우뚝 솟아 자라는 사진을 처음 봤을때처럼 신기했다.
공중재배 밤호박 출처:해남군
지난여름 아빠는 밤호박 두 박스를 들고 KTX를 탔다. 나는 밤호박이 8개나 든 무거운 박스를, 그것도 두 개나 들고 뭐 하러 기차를 타냐며 아빠에게 투덜댔었다. 시부모님과의 식사 자리에서 땀을 뻘뻘 흘린 채 뿌듯한 얼굴로 밤호박을 건네는 아빠의 모습에 "아니 이 무거운걸.." 하며 온 가족이 놀랐었더랬다.그냥 택배로 보내도 되는건데 아빠는 시부모님께 직접 전해드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빠는 올해도 우리 집, 시부모님, 시할아버지댁까지 넉넉하게 밤호박 6박스를 이번엔 '택배'로 보내주었고 그 정성이 전달되었는지 시어머님은 밤호박계 큰손이 되어서 해남의 보물 밤호박을 천리길이 넘는 서울에 널리 알리셨다.평소에도 주문이 많아 바쁘시지만 이번 밤호박철은 특히 우리 집 사람들의 계속되는 주문 때문에 더더욱 바쁘셨을 밤호박 농부님의 연락처도 내년을 위해 잘 저장해두었다.
이 글을 쓰며 아빠와의 채팅창을 열어보다 밤호박을 보냈다는 무뚝뚝한 메시지 뒤에 핼러윈 호박 이모티콘을 붙인 아빠의 귀여움에 웃음이 피식 난다.나도 이번에 처음 알았는데 음식 이모티콘에 호박은 없구나. 저 호박을 찾으려고 아빠는 작은 이모티콘 창을 열심히 뒤적거렸겠지. 아빠가 나에게 매 여름 밤호박을 보내줄 수 있을 만큼만 건강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