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글 쓰는 이야기를 하면서 채소와 그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싶은데 소재가 없다 우리가 그동안 뭘 먹었느냐, 어떤 채소가 있었나 물었다. 남편은 강촌 할아버지댁 텃밭에서 따온 고추를 쓰라고 했다. 맞다. 어머님께서 강촌에 다녀오실 때 가끔 텃밭에서 고추를 따다 주시곤 했지. 그럼 고추에 담긴 스토리는? "고추처럼 매콤한 시집살이?" 남편 입에서 그 말이 나올 줄 몰랐다. 시댁에서 준 고추는 하나도 안 맵지만 시집살이는 매웠다? 그런 뻔한 건 쓰고 싶지 않다.반려.(단지 '시집살이는 고추처럼 매운 거 아냐?'라는 편견이 있을 뿐 시어머니께서 따다 주신 강촌 텃밭 고추처럼 저의 시집살이는 하나도 맵지 않음을 미리 밝힙니다. )
다시 원글로 돌아와서, 내가 건강 식단을 시작하고 가장 좋아한 사람은 바로 엄마였다. 오랜 자취 생활 동안 엄마가 각종 채소와 반찬을 택배로 보내주곤 했는데 그땐 늘 다 못 먹고 버리기 일쑤였다. 지금은 그게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이었는지 깨닫고 엄마가 보내준 건 보약이다 생각하며 열심히 먹고 있다.
3월엔 엄마가 집 앞 지천에 널려있는 봄나물을 직접 따서보내줬다. 쑥, 돌미나리, 돌나물, 머위나물, 생취나물, 민들레까지.. 잘 먹고 있다고 하니 3박스째 가득 보내셨다. 솔직히 말하면 민들레를 먹는 건 영 내키지 않아 다 버렸다. 처음엔 어마무시한 양에 이걸 언제 다 손질하고 먹냐고 엄마에게 짜증을 냈는데 막상 손질해 보니 얼마 안 돼서 머쓱했다.
주말 아침 여유롭게 라디오를 들으며 쑥을 손질하는 시간은 한 주의 쉼이자 힐링이었다. 시골에서 갓 딴 쑥은 향이 정말 진하다. 손끝에 남는 쑥향에 하루종일 기분이 좋았다. 매일 똑같은 된장으로 끓이는 된장국에 쑥을 넣으니 더 향긋해졌고, 밀가루보다 쑥을 훨씬 많이 넣은 소박한데 호화로운 쑥전도 잔뜩 먹었다.
손질한 쑥과 봄나물들
그래도 쑥이 남아 쑥 요리를 검색해 보다 '쑥버무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쑥떡은 많이 먹어봤지만 쑥버무리라는 것은 먹어본 기억이 없었다. 떡도 아니고 전도 아닌 것이 생긴 건 요상한데 엄청 맛있다고 하니 그 맛이 궁금해 남편과 나는쑥버무리 만들기에 도전했다. 3차의 실패 끝에 인터넷에서 본 것 같은 포실포실한 쑥버무리가 완성되었다. 은은한 단맛과 향긋한 쑥향이 느껴지는 건강한 요리였다. 잣과, 알밤도 넣으니 세상에 이보다 맛있는 건 없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감동적인 맛이었다.
남편은 쑥 한 봉지와 함께 방금 만든 따끈따끈한 쑥버무리를 시부모님께 가져다 드리겠다고 했다.(그렇게 많이 해먹고도 쑥이 남았었다.) 부모님께 맛 보여 드리고 싶을 만큼 소중하고 귀했던 것이다. 지하철로 1시간 이내니 가까운 거리긴 하지만 그걸 또 굳이 갖다 드리는 게 귀찮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잘 다녀오라고 했다. 엄마에게 쑥버무리를 맛있게 해 먹었고 남편이 시부모님께도 가져다 드렸다고 하니 너무 잘했다며 또 보낼 테니 더 가져다 드리라고 했다.
나는 결혼 전부터 엄마에게 시부모님께 잘해야 한다 라는 말을 심심찮게 들었다. 앞으로 결혼을 할지 안 할지도 모르는데, 요즘은 그런 시대 아닌데! 모든 게 잔소리로 느껴졌던 나는 그때마다 mz며느리에 빙의해 엄마의 말에 반박했다. 천하제일 시집살이 대회가 있으면 아차상 정도는 탈 수 있는 엄마임에도 시댁에 잘하라고 하다니, 이 모든 게 가정의 평화를 위한 엄마의 인내와 희생이었다는 걸 알기에 마음이 조금 먹먹했다.
엄마가 쑥을 자꾸만 보낸 건 아직 어리석은 나에게 지혜로운 인간이 되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아직 시댁과도 더 많이 버무려져야 하는 나, 쑥을 잔뜩 보내준 엄마에게 감사의 인사보다 짜증을 먼저 부려버린 나, 나도 불완전한 인간이면서 남편의 티끌에는 엄격한 나, 나이만 먹었지 아직은 미련한 곰 같은 나. 언제 현명한 인간이 되려나. 어쩔 수 없이 매년 쑥버무리를 먹어야겠다.
여자에게 쑥이 엄청 좋다며 비 온 뒤 쑥이 쑤욱 자랐다며 딸 생각하며 열심히 쑥을 캐러 다녔을 우리 엄마, 아직도 철없는 딸 육아 중인 우리 엄마.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