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전에 있었던 일이다. 어느 날 남편(그 당시 남자친구)과 지하철에탔는데 어떤 할머니 옆에 한 자리가 비어 나는 거기에 앉고 남편은 그 앞에 서 있었다. 옆에 앉은 할머니가 우리를 찬찬히 보더니 나에게 둘이 남매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남자친구라고 하니 꼭 닮아서 남매인 줄 알았다고 하셨다. 사실 둘이 닮았다고 하면 내가 살짝 억울한 쪽이긴 하다.
어쨌거나 둘이 닮았다는 말로 대화의 물꼬를 튼 그 할머니는 남편에게'얼굴에 밥이 많다.'라고 했다. 처음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네? 얼굴에 밥이 많다고요?듣도 보도 못한 희한한 말에 좀 황당했는데 남편이 실제로 밥을 많이 먹는 사람이긴 하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더 들어보니 남편의 관상이 밥 먹고 살 걱정은 없겠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복이 많다.', '밥 잘 먹게 생겼다.'도 아닌 '얼굴에 밥이 많다.'라니.. 할머니의 기발한 표현이 너무 재밌어서 한동안 동네방네 얘기하고 다녔다. 지금 이 이야기를 쓰면서도 너무 웃겨서 'ㅋ'을 여러 개 붙이고 싶지만 진지하게 글을 쓰는 중이니 참는다.
사실 누구라도 남편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봤거나 사진을 보여주면 모두 밥이 많다는 말에 수긍한다. 남편은 진로소주의 캐릭터인 파란 두꺼비를 약간 닮았는데 그땐 살이 쪘을 때라 그 말이 더 어울렸다.
두꺼비 얼굴에도 밥이 많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남편과 얘기를 나누다 알게 되었는데 사실 남편의 영어 이름이 '밥(Bob)'이었다고 한다. 그 할머니 때문에 지어낸 것이 아니고 정말로 초등학교 때 영어학원에서 지은 이름이 '밥'이란다. 이 남자와 밥의 인연은 어디까지인가.자기도 모르게 밥이 끌리는 걸까. 하긴 남편이 저스틴이나 티모시 상은 아니긴 하다.
Bob은 밥을잘 먹는다.Bob은 먹는 것뿐만 아니라 요리하는 것도 좋아한다. 새로운 식재료와 다양한 레시피를 탐구하는 열정 덕분에 Bob은 늘 맛있는 밥을 해 먹는다. Bob은 한국인이 꼭 챙겨 먹는 밥처럼 든든하고 편안하다. 또 Bob은 잡곡밥, 볶음밥, 솥밥처럼 색다른 매력도 가지고 있다. 처음 보는 할머니의 말이었지만 어쩌면 본질을 꿰뚫었던 그 말.
그렇다면 내 얼굴엔 뭐가 많을까? 아니, 내 얼굴엔 무엇을 담을까? 남편이 밥이라면 나는 그와 잘 어울리는 된장국이 좋겠다. 그중에서도 미소 된장이 마음에 든다! 꼭얼굴에 뭔가를 담아야 한다면 나는 그게 미소였으면 좋겠다. 한때 된장녀는 누군가를 비하하는 말로 쓰였다. 하지만 된장이 건강에 얼마나 좋은 것인데 나쁜 의미로 쓰이는 것은 적절치 않다.누군가는 복숭아상, 과즙상을 외칠 때 나는 스스로 미소(된장) 상이 되어볼까 한다.
한편 나는 영어 이름이 마땅히 없고 꼭 필요하다면 이름의 이니셜을 사용한다. 영어 이름을 짓는 게 어색하기도 하고 이것저것 만들어봤는데 딱 이거다 싶은 게 없었다. 그런 나를 스쳐간 많은 이름 중 떠오르는 영어이름이 하나 있는데 바로 친구가 지어준 '써니(sunny)'이다. 한때 친구는 나를 써니라고 불렀는데 호탕하게 웃는 모습이 개그우먼 정선희를 닮았기 때문이었다. 이쯤 되면 나와 남편의 모습이 어떨지 궁금해질 사람들이 생길 것이다.
미소와 써니. 꽤 괜찮은 조합이 아닌가? 자칭 미소 같은 여자(산소 같은 여자에 대한 나름의 오마주이다.), 타칭 써니(비록 한 명만 나를 이렇게 부르지만)인 나는 얼굴에 웃음을 담아야겠다. 때론 은은한 미소로 편안하게, 때론 해가 뜬 맑은 날씨 같은 웃음으로 경쾌하게.지하철에서 우연히 본 사람이저 사람 얼굴엔 웃음이 많다고 생각할 정도로 가득가득 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