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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형란 Jul 21. 2016

진인사대천명

중국어 뉴스 인강 : www.screenchinese.com

중국 드라마 대사로 배우는 HSK단어와 중국어회화 : 
https://www.youtube.com/channel/UC_1ftGlAb2X9uvvzQxW-dpA



난 어느 순간에라도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이 있다.  내 눈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신기해 보이지만, 평소에 별로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이 없는 사람들 눈엔 내가 신기해 보이기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막연히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과 '해내는 것' 사이에는 얼마나 멀고 험한 길이 있는지...

직장 그만두고 세계일주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 아이는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세네 명 낳아 기르는 것, 결혼 후에 부모님 모시고 살면 효도하고 좋지 하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모시고 사는 것...

이렇게, 하고 싶은 것과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 사이가 먼 것들을 이야기하자면 밤을 새도 모자랄 것이다.

내게도, 막연히 '하고 싶다...'고 생각하던 일을 실천에 옮겼다가 실컷 고생했던 경험이 하나 있다.


요즘은 북경, 상해 등지에서는 대부분의 음식점에서 사진이 들어간 메뉴판을 보면서 음식을 주문할 수 있지만, 내가 어학연수하던 시절만 해도 五道口 정도에서만 사진 있는 메뉴판을 볼 수 있었다.

군대에 다녀온 사람들 누구에게나 PX에 관한 추억 하나씩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당시 중국으로 연수나 유학을 갔던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화장실과 메뉴판에 관한 웃지 못할 경험담이 있게 마련이었다. 아무리 작은 음식점이라도 최소 백 가지 정도의 메뉴가 쓰여있고, 메뉴판을 펼치면 네 글자, 네 글자씩으로 된 음식 이름이 몇 페이지씩 나열되어 있으므로, 음식명을 보고 음식을 시켜먹는다는 것은 HSK 11급 받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그래서 대부분 늘 시켜먹던 걸 먹고, 남들이 먹어보란 것들을 먹게 마련이었다. 아무 거나 시켰다가 특이한 냄새가 나는 음식이 나왔다거나, 탕수육 접시만한 접시에 돼지비계만 그득 담겨 나왔다거나, 이것저것 시킨다고 시켰는데 나중에 나온 걸 보니 닭다리, 닭껍질 튀김, 닭고기 조림 등 온통 닭요리만 나왔다거나 하는 등등의 무용담(?)은 중국에서 공부하는 한국 학생들의 주요 화제였다. 늘, 누가 메뉴판 좀 번역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중국어 어휘사전을 내고 출판사와 연락이 있게 된 후론, 그 누군가가 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출판사에 중국요리 메뉴판의 요리 이름을 번역한 책을 내면 안 되겠냐고 제안을 했더니, 사진만 있다면 내줄 수 있다고 했다.


신이 난 나와 중국인 저출판 후에 받게 될 원고료 2백만 원 전부를 중국에 있는 지인에게 보내어 대표적인 중국요리 3백 개의 사진을 찍어서 보내달라고 했다. 저작권이 걸린 문제였으므로, 사진은 모두 새 것이어야 했다. 사진을 모으는 과정은 의외로 순탄치 않았으나 우여곡절 끝에 북방 요리 사진은 얼추 모았는데, 남부에 지인이 없어서, 그런 부탁할 사이는 전혀 아닌, 여러 다리 건너의 누군가에게 상해 음식 사진을 부탁했는데, 이 분은 너무 황송하게도 보수 한 푼도 받지 않고 상어지느러미(*)까지 사 먹어가며 사진을 찍어서 보내주었다.


사진이 거의 모였다고 생각했더니 饺子,油条 등의 가장 기본적인 小吃 사진이 하나도 없었다. 이번엔 중국에 주재원 부인으로 나가 있는 예전 수강생에게 연락을 했는데, 그 수강생은 오늘내일 출산할 만삭의 몸으로 추운 겨울에 거리에 나가 油条,包子 등을 사다가 사진을 찍어서 보내주었다.


사진을 정말로 다 모았더니 중국인 저자인 동료강사가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유학 가기 전 중국으로 잠시 돌아가 아버지 병상을 지키는 한 달 동안 요리책의 중국어 부분을 완성해서 보내주었다. 원고료 한 푼 받지 않고 해준 일인 것을 생각하면, 역시 너무 미안한 일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드디어 최종 원고가 내 손으로 들어왔을 때, 난 금방 번역해서 출판사로 넘길 수 있을 줄 알았다. 뭐 넣고 뭐 넣고 볶는다, 맛은 짜다... 내가 할 일은 이 정도의 번역을 하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복병이 있었다.  중국어로는 미역과 다시마가 똑같이 海带이고, 黑鱼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우럭과 가물치가 같이 나온다. 갓과 우거지가 한 단어로 쓰이고, 螺를 찾으면 우렁, 다슬기, 소라, 고둥이 다 나온다. 이런 게 5개 정도면 그 요리는 책에서 빼면 되겠지만, 내가 해석할 수 없는 게 50개나 되었다. 요리 사진은 있었지만, 요리된 상태로 있는 시커먼 생선이 우럭인지 가물치인지, 퍼렇게 삶긴 채소가 갓인지 우거지인지 알 방도는 없었다. 일하는 곳이 중국어 학원이므로 내 주변은 온통 중국인이었으나, 그 요리들을 아는 사람은 많아도 그 재료의 한국어 이름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참 너무도 예상치 못한 난관이었는데, 설상가상으로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6개월 기한으로 계약한 책이었는데 벌써 2년이 지났으므로, 일주일 내로 원고가 도착하지 않으면 출판계획을 취소하겠다는 통지였다. 돈도 돈이지만, 너무도 많은 사람에게 폐를 끼치고 여기까지 온 것이어서 나는 꼭 책을 출판해서, 책이 나왔다고, 너무 감사했다고 인사를 해야 하는 처지였다.


최후 통지를 받은 날은 월요일이었다. 그때 우리 학원은 밤 10시에 문을 닫았는데, 나는 저녁 8시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마쳤다. 심지어 2차, 3차 교정에서 할 일까지 다 마치곤 컴퓨터 앞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그저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로 출판사에서 준 기한인 금요일까지 컴퓨터 앞에서 매일 밤 10시까지 앉아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했다.  


한 시간쯤 앉아 있었는데, 누군가 나를 찾아왔다. 2년 전쯤 연락이 끊긴 성어 스터디 멤버였는데, 밤 9시에 뜬금없이 들국화 한 다발을 들고 날 찾아와서는  "괜찮아요?"하고 인사를 해왔다. 그렇지 않아도 답답하던 나는 그녀를 붙들고 한바탕 하소연을 쏟아냈다.  나로선 그저 하소연이었지 뭘 기대했던 건 아니다.  이야기를 다 마친 내가 "누구 나 좀 도와줄 사람 없을까요?" 했을 때, 그녀는 뜻밖에도 "있어요"라고 대답하는 거였다. 그녀가 일하는 엠파스 한중번역팀에 얼마 전 인턴으로 25세의 아가씨가 들어왔는데, 아버지가 중국인, 어머니가 한국인이고, 요리는 주로 아버지가 하신다고 했다. 그다음 날로 그 아가씨에게 원고를 보내어 일주일 만에 50개를 깔끔하게 번역하고, 애초에는 엄두도 못 냈던 한국인 선호도 표시까지 더해서 출판사에 넘길 수 있었다.  참고로, 나를 괴롭혔던 그 검은 생선은 사천요리이므로 민물고기인 가물치라고 했다.


더 신기한 것은 내 지인(이제는 절친한 친구가 된)이 그 아가씨의 신상을 파악한 것이 바로 그 월요일 낮의 인턴 환영 점심 모임에서였고, 그 아가씨는 그 회사에서 두 주 더 있다가, 그러니까 내 원고를 일주일 동안 수정하고, 일주일 동안 교정을 봐준 후에 다른 회사에 정식으로 취직이 되어 떠났다는 것이다. 정말 기가 막히지 않은가.


그 후로 나는 뭔가 일이 꼬이고 잘 안 풀릴 때마다, 내가 할 일을 다 했는지를 먼저 생각한다.  내가 정말 띄어쓰기까지 다 손보고, 마침표까지 다 찍으면, 그다음은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신다는 게 내가 그 일을 통해서 얻은 믿음이다.  내게는 귀한 신앙의 간증이지만, 신앙이 없는 독자라면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을 떠올려도 좋겠다.


사방이 벽 같을 때, 나갈 구멍이 없을 것 같을 때, 내가 할 일을 정말로 다했나, 한 번만 돌아보자.  정말 다 했는데 일이 안 풀리는 거라면, 그 일은 안 되는 게 내게 좋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까지 다 했다면, 그리고 그 일이 내게 일어나야 좋은 거라면, 나머지는 하늘이 알아서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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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어 지느러미 요리는, 행여라도 내 책을 보고 사먹는 사람이 있을까봐 책에 싣지 않고 싶었으나, 비싼 요리를 자기 돈으로 사 먹고 사진을 보내준 분의 성의를 생각해서 결국 책에 실었다.  이 책을 만드는 과정 중에서 유일하게 마음에 걸렸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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