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형란 Dec 16. 2016

성선설의 증거

눈 오는 날 연탄재

서울 지역의 시내버스 안내양은 1985년 7월에 사라졌다.

나는 그해 겨울, 그러니까 84년 12월 말부터 85년 2월 말까지 134번 노선버스에서 안내양으로 일했다. 안내양의 막차를 탄 셈이다. 대입시험을 마치고, 학교에 들어가기 전 두 달 남짓한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안내양으로 일하면 숙식이 제공된다는 말에 고민 한 번 해보지 않고 버스 종점으로 향했다. 하루 18시간 노동이긴 했지만, 숙식도 제공되고 무엇보다 임금이 다른 곳의 180% 정도였으므로, 민망한 것만 견딜 수 있다면 괜찮은 일자리였다.


예상치 못했던 것은 수습기간에는 숙식제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보수는 당연히 없었고, 점심값도 내야 했고, 왕복 차비도 들었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수습 딱지를 떼고 싶었지만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정거장 외우는 일이야 어렵지 않았어도, 출퇴근 시간에 잔돈 거슬러 주는 일은 아무리 빨리 하려고 해도 되질 않았다. 거스름돈을 늦게 거슬러준다고, 수습 딱지 떼는 걸 허가해줘야 할 고참 언니가 계속 퇴짜를 놓았다. 다행히도 그즈음에 시내버스 안내양이 손으로 차비를 받는 일로 인해 삥땅도 생기고, 삥땅을 의심해서 몸수색도 일어나고, 몸수색을 빙자한 추행도 빈번했던 일련의 상황에 대한 해결책으로 회사 차원에서 버스에 차비 통을 마련하고 안내양에게 차비를 손으로 받지 못하게 하면서 자연스레 나도 수습 딱지를 떼고 일터에 투입이 되었다.


그러니까 그날은 내 생애 처음으로 돈을 받고 일을 하는 날이었다. 길이 막혀 회차가 늦어지면 화장실이 가고 싶고, 배차 간격이 뜨면 욕하는 승객들이 있고, 점심과 저녁 사이가 너무 길어서 배가 고프긴 했지만, 나름대로 순조로운 하루였다.  얼른 차고지로 들어가서 씻고 자야지 하고 생각할 때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대입시험과 수습 딱지의 무게를 털어버린 나를 축하라도 해주듯 시원하게 펑펑 쏟아졌다. 여느 때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창밖의 눈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내 상황은 그렇게 아름다운 게 아니었다. 눈이 쌓이니 차가 모래내 고개를 넘지 못했다. 차가 가지 못하는 건 기사 아저씨만의 일이 아니었다. 커다란 버스가 계속 옆으로 미끄러지니 안내양인 나는 차를 내려서 뒤따라 오는 차들이 너무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막아야 했고, 차 안에 비치되었던 삽으로 눈을 치워야 했고, 승객들에게 연신 사과도 해야 했다. 그야말로 出师不利(수습 기간을 마친 첫 출전에서 불리한 상황을 맞이하다)였다.


시간은 점점 흘러 새벽 한 시가 됐다. 걸어갈 수 있는 승객들은 대부분 차를 내렸고, 차는 여전히 고개를 넘지 못한 채 비스듬히 언덕에 얹혀 있었다. 나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는데, 문득 차창 밖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동네 주민들이 몰려나와 고개에 연탄재를 뿌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사실 그들은 이미 무사히 귀가한 사람들이었으므로, 편히 씻고 자면 되는 상황이었다. 굳이 그 새벽에 남을 위해서 연탄재를 들고 나와 깨면서 옷을 눈과 연탄재 범벅으로 만들며 고생을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도 그 순간이 지나면 다시 보지 못할 우리를 위해서 수십 명의 주민들이 나와서 그 넓은 모래내 고개를 온통 연탄재로 덮어놓았다.  정말이지 꽃으로도 때리면 안 될 고운 사람들이었다. 그들 덕에 버스는 연탄재를 밟고 고개를 넘어 비록 새벽 두 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차고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오늘 한겨레 신문을 보니, 최순실 청문회를 보면서는 절로 성악설이 믿어진다는 내용이 있었다. 사실 그렇다. 얼굴에 '나는 악해요'라고 쓰여 있는 것 같은 김기춘, 최순실...  정말 쳐다보기도 싫다. 내 마음도 성악설로 기울어지려는 순간, 내가 처음으로 돈을 벌었던 그 눈 오는 날, 연탄재를 뿌리던 사람들이 생각났다. 그들은 내 마음속의 비상금처럼 언제라도 내가 성악설을 믿고 싶어질 때면, 가만히 내  등을 두드리며 성선설을 놓지 않게 해준다. 내게는 성선설의 부적 같던 연탄재를 이제는 눈 오는 날에도 볼 수 없게 되었으니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준비되지 않은 직장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