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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진 Mar 17. 2020

언니 화났어?

딸아, 너의 말로 아빠도 자란단다


세 가족이 나란히 누워

기가 막힌 피아노 연주 영상을 보고 있었다.


고품격 연주에

나도 모르게 혼을 빼앗기고 있었는데 대뜸,
  


"아빠아! 언니가아~~ 화가 났나 봐....... “


언니 화났나봐.......




MBC <놀면 뭐하니?>에서도 화제가 되었던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손열음 씨의 공연이었다.
연주에 완전히 몰입한 그녀의 얼굴을 아주 타이트하게

잡은 화면이 나오자 하연이가 한 말이다.
 
“아빠아! 언니가아~~ 화가 났나 봐.......”

아내와 나는 순간 빵 터지고 말았다.
몇 초 동안을 구르고 뒹굴며 쉼 없이 웃은 뒤,
웃음을 참으며 차근차근 이야기를 시작했다.
  
"푸하하하. 하연아 화난 게 아니고

 올라오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거야.
 그러다 보니 저런 표정이 나오는 거고.

 하연이한테는 좀 어렵찌요?”
  
클라이맥스가 지나고 고요하게 연주하는 장면에서

또다시 입을 떼는 하연이,
  
"엄마, 언니 졸리나 바.......“
  
계속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지만

설명을 이어갔다.
  
“지금은 곡의 분위기에 맞게 피아노를 조용히

 치려고 하는 거야. 졸린 게 아니고.”
  



다음 날 아침 하연이와의 대화가 불쑥 떠올랐다.
평소 나는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한번

확인해 보고 싶었다.
  
예상대로였다.
오늘도 여전히 무표정.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매일매일 거의 무표정하게 살아가고 있었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아무리 재밌는 일이 생겨도

마음껏 웃음을 터트리지 못한다.
내가 있는 장소, 함께 있는 사람, 보내는 시간에 따라
온전한 나의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뭐 내가 삶의 모든 순간을

무미건조하게 대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익숙한 모습을 굳이 다르게 바꿀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하연이가 얼굴 표정에서 그 사람의 감정을 읽어낼 줄

알게 되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하연이가 “우리 아빠는 항상 화난 얼굴을 하고 있어요.”,
“우리 아빠는 잘 안 웃어요.”라고 하면 어쩌지.
  
웃고 싶을 때 마음껏 웃고,
울고 싶을 땐 마냥 우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 줄 몰랐다.
  
딸을 통해 또다시 배운다.


우리는 아이의 모습으로 돌아갈 때

온전한 삶을 느낄 수 있다.
  
잃어버린 나 자신을 되찾는 일,
 
어느덧 메말라버린 감정을 끄집어내

자유로운 감정 표현을 하는 것,
  
한 번뿐인 생을 그저 즐기는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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