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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투토끼 Aug 21. 2024

천사는 가끔 사람들을 통해 일한다.

feat. 조마조마 인생 첫 에어컨 설치일기

대학생 시절 8주간의 여름방학 동안 방문했던 

필리핀 마닐라 공항의 날씨가 

물씬 느껴지는 요즘이다. 


이 더위에도 나 혼자면 

달달 거리는 선풍기 하나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뻘뻘 땀을 흥건히 흘리며 

잠을 자는 아이들을 보면

이렇게 버티는 건 어쩌면 학대 수준이다. 




전투토끼의 브런치 첫 글.

https://brunch.co.kr/@war-rabbit1085/6

브런치에 첫 글에 "like"를 눌러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다음 주 드디어 우리의 보금자리에도 

에어컨이 생겼다.

벽걸이 보다도 훨씬 큰 기다란 

스탠딩 에어컨 자태가 늠름하다.






그리고 에어컨 설치일의 이야기.



늘 그렇듯, 가전 배송은 배송일만 알려주고 시간은 

그날 아침에 배정되는 대로 정해지는 것 같았다.


'오늘 정말 에어컨이 오려나.' 하는 찰나

아침 8시가 조금 지난 무렵, 전화기가 울렸다.


기사님 : 에어컨 배송기사입니다. 

이따 오후에 가도 될까요?


평소 같으면 편하신 대로 오라고 할 터이지만

에어컨은 설치 이슈가 있어 

최대한 빨리 해결을 하고 싶었다.


나 : 혹시 가장 빨리 오실 수 있으면 몇 시일까요?

기사님 : 아, 그럼 9시 20분까지 가겠습니다.




(앗, 그때는 둘째 등원준비로 한창인 때지만, 

놓칠 수 없어~")


그리고 운이 좋게도 친절한 기사님이신 것 같다! 



나 : 네에, 오세요.


일단 첫째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포동포동한 귀요미 둘째 아침 먹이고, 옷 입히고, 

설거지하고, 머리 빗기던 중,


"딩동"


배송기사님 2분이 서계셨다.


더위를 핑계로 집안 꼴이 영 엉망이어서 

후다닥 몇 가지를 치우고는 

이걸로는 영 안 되겠다 싶어 그냥 문을 열어드렸다. 


나 : 안녕하세요!:D

반가움과 설렘 그리고 긴장.


기사님 두 분은 이리저리 살펴보시더니, 

나를 부르셨다.


기사님 : 여기 배관이 구형이라서 신형 에어컨은 

관이 둘 다 차가워져서 구멍을 새로 뚫어서 

설치를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러면 배관을 건물에 구멍을 뚫어서 

밖으로 빙 둘러서 설치를 해야 하는데, 

그러면 설치 비용이 좀 나올 것 같아요.'


머리가 복잡해지는 느낌이었다. 


나 : 설치비가 얼마나 나올까요?

기사님 : 한 60만 원 정도요. 

아니면 밖에 앵글로 실외기 설치해야 하는데, 

구멍도 밑에 간판이 있어서 뚫으려면 좀 복잡하네요.


원래 한 20-30만 원 정도를 

예산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설치를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건물에 구멍도 뚫어야 한다니, 

주인아주머니께 전화드려 먼저 물어야 했다.


나 : 안녕하세요. 여기 OO호인 데요, 

아침에 실례합니다. 

저희 에어컨을 설치하려고 하는데, 

구형 배관을 쓸 수가 없어서 

신형 배관하려면 

건물에 새로 구멍을 좀 뚫어야 한다고 해서요, 

괜찮으실까요?


주인아주머니 : 구멍을 어디다가 뚫나요? 

건물 뒤쪽? 앞쪽?


나 : 앞쪽이요, 보기가 좀 그렇지요? 


주인아주머니 : 애기들 있는데 

에어컨 없으면 안 되지, 

보기 싫기는 한데, 필요하면 뚫어야지요 뭐.


평소 마음씨가 좋으신 주인아주머니 셔서 

흔쾌히 승낙을 해주시긴 했지만, 

어떤 모양으로 설치가 되려나, 

공사가 복잡할 것 같아 

잘 마무리될지 걱정이 앞섰다. 


'부스럭'

인기척이 나서 돌아보니 주인아주머니가 계셨다. 


기사님 : 주인분이세요? 

저희가 구형 배관이 안돼서, 

구멍을 좀 뚫어야 돼서요. 

주인아주머니 : 그냥 구형으로 하면 안 될까요? 

여기 다른 집들도 다 그렇게 해서. 


나도 공사 없이 구형 배관을 사용해서 

설치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기사님들이 혹 구형 배관으로 

설치했을 경우, 

결로가 생길 수도 있어서

주인분께서 각서를 써주셔야 

구형 배관으로 작업이 가능하다고 하셨다. 

세입자인 나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주인아주머니 : 그럼, 각서 써드릴 테니 

구형 배관으로 해주세요. 


(얏호, 감사합니다! 오예바리~예스바레~~)


구형 배관을 이용하면 비용도 그렇고 설치 공사 없이 

비교적 간단하게 설치가 된다는 사실에 

마음이 기뻤다.


그렇게 주인분께서는 흔쾌히 각서를 써주셨다. 


공사는 약 2시간 정도 걸린다고 하였다. 

나는 공사가 시작되는 것을 보고 

얼른 둘째를 데려다주러 다녀왔다. 


돌아가는 길에 감사한 마음이 들어 

기사님께 전화를 드렸다. 

나 : 커피 사갈까 하는데 뭐 드시겠어요?  

기사님 : 아메리카노 두 잔이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공사하시는 동안 

나도 옆에서 열심히 집안 청소를 하며 

오랜만에 부지런한 면모를 보였다.

공사는 다행히 순조롭게 잘 마무리되었다. 

우리 집용 실외기가 반짝반짝 영롱해 보였다.


집에 들어서서 시원한 공기가 코로 느껴지니 

정말 신이 나서 콧노래가 나왔다. 

이렇게 좋을 일이라.ㅎㅎ



아이들도 저녁에 에어컨을 보면 

얼마나 신나 할지를 생각하니 내 마음도 신이 났다. 

 

이 더위에 이렇게 소중한 에어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운 날씨에 공사하시느라 수고하신 기사님들,

그리고 너그럽게 배려해주신 주인 아주머니

천사들은 가끔 사람들을 통해 일한다.



이 날을 잊지 않고, 나도 더위에 힘들어하는 

누군가의 집에 에어컨을 선물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삶에서 무엇을 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삶에서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지가

전부다. 

I live with fully happiness.



by 전투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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