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광주, 군산, 충주, 순천, 제주, 공주, 구미, 청주… 전국을 쏘다니기를 좋아하는 나에게, 지방 출장은 여행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동료들과 함께한다면 색다른 추억을 쌓을 수 있어서 더 좋았다. 아프기 전까진 말이다.
날씨가 화창한 어느 날, 부산 출장이 잡혔다. 주말에 연휴까지 끼면 4박 5일을 부산에서 지낼 수 있는 일정이었다.
너무 좋은 기회인 것 같은데 무리해서라도 가 볼까?
… 동료들이 그동안 꾀병이었다고 생각하면 어떡해.
교통비랑 숙박비 전부 회사에서 내주는데?
… 내가 뭐 그 돈 없어서 부산 못 가냐.
팀원들은 나 빼고 다 간다는데?
… 어차피 나는 가 봐야 술도 안 마시는데 뭐.
집 앞 편의점에 가는 것도 힘든데 출장이 웬 말이냐. 캐리어를 끌고, 지하철을 타고, 기차를 타고, 택시를 타는 것도 모자라서, 동료와 같은 방을 쓴다고? 방 안에 동료가 있는데 내가 화장실을 들락거릴 수 있을까? 괜히 갔다가 배라도 아프면 얼마나 괴롭겠어. 지금 이 고민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워서, 그냥 출장을 안 가는 걸로 하고 생각을 접었다. 에휴.
#2
연말의 어느 날에는 부산에서의 업무가 있어서 반드시 출장을 가야만 했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부산역 내에서 열리는 행사에 지원을 나가는 거라, 부산까지만 무사히 도착하면 이동할 필요가 없었다. 역에서 30초 거리에 있는 곳에 호텔을 잡았고, 1인 1실이라 부담이 없었다.
바쁜 하루를 무사히 마치고, 팀원들끼리 저녁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이동하기 어려운 내가 끼어있는 탓에, 부산의 수많은 맛집을 포기하고 부산역 앞 허름한 식당에서 간단히 끼니를 때워야 했다. 식사와 함께 술을 한잔 걸친 직원들은 한껏 고조되어 2차를 가자고 외쳤다.
부산까지 와서 혼자 있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나의 존재가 동료들에게 족쇄가 되는 것 같았다. 고심 끝에 먼저 숙소로 가겠다고 말했다. 동료들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유명한 맛집을 찾아 떠났다. 술에 취해서 신난 건지, 내가 빠져서 신난 건지. 마음은 아프지만, 한편으론 짐이 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혼자 터덜터덜- 이래 봐야 고작 1분 남짓을 걸어 호텔에 돌아왔다. 널브러진 캐리어에서 미리 챙겨 온 책을 꺼냈다. 방을 나서며 지도 앱으로 주변에 갈 만한 카페가 있나 찾아보았다. 부산에서의 시간을 기념할 만한 카페들이 많았지만, 결국 종착지는 호텔 1층에 위치한 스타벅스. 공허한 내 마음과 달리, 카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따뜻한 차를 받아서 부산역이 보이는 창문 앞에 자리를 잡았다. 부산까지 와서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멀뚱히 시간을 보내기엔 아직 밤이 한참 남아서 책을 펼쳤다. 무슨 내용인지도 모른 채 그저 표지가 예뻐서 샀던 책은, 180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었다. 읽다 보니 어느새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가 부산이 아닌 미국에 와 있는 듯했다. 이역만리 타지에서 주인공과 함께 농사도 짓고, 도망도 치던 중 어디선가 한국 말이 들렸다. “5분 뒤 영업 마감합니다.” 테이블을 내려다보니 얼마 마시지도 않았는데 이미 다 식어버린 차가 보였다. 서둘러 자리를 정리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침대에 걸터앉아, 다시 책을 타고 미국으로 떠났다.
어느덧 밤이 늦었는지, 주변이 점차 소란스러워지더니, 동료들이 각자 방으로 흩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2차가 재미있었는지 없었는지, 방에서 3차를 하는지 마는지, 평소와 달리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오히려 2차를 안 간 덕분에, 아니 배가 아픈 덕분에 이런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뻤다. 괴로움 사이에서 한 줄기 빛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3
그리고 몇 달 뒤, 또 부산 출장 일정이 잡혔다. 이번 워크샵엔 퇴사한 직원들도 온다며, 동료는 꼭 같이 가자고 했다. “저는 안 가고 싶어요. 아니, 가고 싶죠. 근데 미래의 제가 후회할 거라는 걸 알아요.” 최근 팀원들과 함께 다닌 출장에서, 내가 가고 싶다며 가 놓고선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여러 번 보였던 탓인지, 동료들은 이해한다고 했다.
물론, 가면 좋았겠지만, 어차피 나는 가서도 혼자 호텔 방에 있을 게 뻔했다. 그리고 지난 출장에서의 경험 덕분에, 혼자 겉돌아도 외롭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쿨하게 부산 출장을 포기했다.
부산에 도착한 동료들은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찍은 단체 사진을, 저녁으로 먹은 싱싱한 회 사진을 보내주었다. 내가 가지 않은 덕분에 (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호텔도 바다 근처로 잡았다고 했다. 예전의 나라면 나 빼고 노는 모습에 속이 쓰렸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히려 혼자 서울에 남아 있는 덕분에 다른 팀 동료와 함께 점심을 먹으며 가까워졌다. 그리고 오랜만에 칼퇴를 하고 혼자 한강이 보이는 카페에서 여유를 즐겼다.
혼자 지내면 뭐 어떠랴! 이렇게 즐겁기만 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