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브레드쇼의 <상처받은 내면아이 치유>를 읽으며 #2
어릴 때 아버지를 무서워했다. 아버지는 종종 술이 취해 집에 돌아오시곤 했다. 아버지가 돌아오는 소리가 들리면 나는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쓰고 누워있곤 했다. 잠을 자는 척 하기도 했지만, 자다 깨서도 마음의 긴장을 놓치 못한 채 뒤척이며 문 밖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기도 했다.
아버지의 기분이 좋았던 하루에는 별 탈 없이 지나갔지만, 아버지의 기분이 좋지 않았던 날에는 자고 있어도 깨우시곤 했다. 그리고는 아버지에게 혼이 나곤 했는데, 낮에 잘못했던 소소한 일에 대해 다시 기억을 되짚어야 했다. 이유가 잘 기억나진 않지만, '해도 하나, 달도 하나, 동생도 하나'라는 말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을 보면, 동생과 싸웠거나, 인사를 잘 안했거나, 밥을 잘 먹지 않았거나 하는 소소한 잘못들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손에 침을 한 번 탁 뱉고, "매 어딨어?"라고 말을 했다. 나는 그 매가 무서워 바들바들 떨었다. 자다 일어나서 맞는 매는 처량했고, 많이 아팠다. 두려움이 몰아닥치면 무조건 잘못했다고 말했다. 뭐가 잘못했는지. 어쨌든 아버지를 화나게 했다는 사실은 나에게 잘못이었고, 곧 매를 맞아야 하는 댓가가 있는 일이었다. 어머니도 나에게 일단 잘못했다고 말하라고 했다.
"몇 대 맞을래?"
한 대도 아팠고, 두 대도 아팠다. 아버지에게 매를 맞아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나에게는 두려움이고 공포가 되는 일이었다. 그 중 매번이나 매를 맞았는지, 겁을 주고 난 뒤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다. 맞은 날도 있었고, 맞지 않은 날도 있었다.
아버지가 내 이름을 부를 때면 이미 나는 울고 있었다. 내 마음에 휘몰아치는 공포를 나는 어떻게 해야할 지 몰랐다. 아버지는 내가 우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약해지시곤 했다. 금방 매를 때릴 것 같이 했다가도 내가 우는 모습을 보면 매를 거두기도 했다.
커서도 눈물이 많은 아이로 자랐다. 내가 원래 눈물이 많은 아이었는지, 아니면 눈물이 많아지게 자란 것인지는 모르겠다. 슬픈 영화나 드라마를 봐도, 감동적인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제일 먼저, 가장 많이 울고 있는 사람이 나였다. 작은 일에도 눈물부터 났다. 그러던 내가 어느 순간 눈물이 말라버렸다.
"그렇게 질질 우니까 남편이 진절머리가 나지!"
시어머니에게 그 말을 들은 후부터였을까? 나의 울음에서는 쓴 냄새가 났다. 다른 이야기보다 내 현실 속 하루가 더 버거워지던 순간부터 잘 울지 않았다. 울면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나 한 사람의 삶의 크기도 버거운 현실 속에 어느 순간 한 손에 한 명씩, 내 두 손을 붙든 아이들의 작은 손이 있었다.
위기를 겪고 상담을 할 때였다. 일어난 일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리는 나를 보며 말했다. 울고 있는 이유가 뭐냐고, 울고 있을 때 부모님은 어떻게 했냐고. 어린시절 일을 이야기했고, 상대의 이야기를 들을며 내 울음이 어린시절에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방법으로 아직도 여겨지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로는 우는 것이 더 수치스럽게 여겨졌다. 내가 울고 있는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비춰지는 것인지 부끄러웠다. 상처 많고, 부끄러운 내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 같아 피하고 싶었다. 울고 울었어야 할 눈물이 안으로 괴였다.
존 브래드쇼는 [상처받은 내면아이 치유]에서 "우리 모두가 얼마든지 눈물을 표현할 수 있고, 또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한다."고 했다. 어른이 된 내가 울음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한바탕 울고나면 시원한 바람이 느껴지는 날이 찾아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