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자신과 닮은 색이 무어냐고 물어본다면 무채색 같은 사람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어디든 무난하게 존재하는 그런 무채색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내 의사를 표현 해 이야기 하기보다 모두의 의견을 따라 맞추어 사는 무거운 듯 조용하고 무난한 그런 색의 존재라고 생각하며 몇십 년을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친구의 제안으로 난생처음 사주팔자를 보게 된 일이 있었다.
'내 생일과 태어난 시로 나를 알 수 있다니! 참 신기한 경험이겠구나.' 하며 반의 의구심과 반의 호기심으로 친구와 함께 사주를 보았다. 사주 선생님께서는 신기하게도 나에 대해 오랫동안 아는 분처럼 말씀해주셨다. 신기한 마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경청하고는 친구와 가게를 나와 재밌던 그 경험을 이야기 하기에 여념 없었다. "근데 좀 안 맞는 부분도 있는 거 같아. 내가 고집이 세다니. 그렇지?" 하는 내 질문에 친구는 "너 고집 쎄."라는 대답을 해주었다. 내가 고집이 센 사람이라니. 나는 평생 무채색 같은 존재라며 여기고 살아왔는데 내가 고집 있는 사람이었던가? 조금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친구에게 "내가 고집이 세다고? 내가 무슨 고집이 쎄."라고 묻자 "너 정말 모르는구나? 넌 네가 맞다고 여기는 일은 고집이 정말 쎄."라고 대답해주는 것이다.
'아. 내가 고집이 있는 사람이었구나'라고 생각하며 조금은 벙 찐 모습으로 나를 다시 되돌아보게 되었다.
내가 생각하고 있던 내 모습이 다른 사람이 보기엔 조금 다를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정해 둔 내 모습으로 난 그런 사람이 맞다고 믿으며 여태 살고 있었던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럼 나는 나를 잘 알고 있었나?라는 생각까지 길게 뻗쳤다. 생각보다 나는 내 자신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많았다. 특히 대부분 부정적인 내 단점에 대해 더 잘 알지 못한 것 같다. 객관적으로 보기 어려울뿐더러 단점을 굳이 깊이 들여다보고 싶지 않던 내 마음에서도 그 이유가 있었다. 난 내 단점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고 생각하며 받아들인 적이 있던가? 하고 생각해보니 그런 경험이 많진 않았다. 그래서 친구가 처음으로 고집이 세다며 이야기해주었을 때도 무슨 소리냐며 반문하기도 했다. 종종 나가 인정하기 싫은 모습들이 내 안에 존재한다. 그런 내 모습은 내 자신보다 다른 이들이 더 잘 알아볼 때가 있다. 내가 생각하며 살아온 내 모습이 있기에 이런 이야기들을 단번에 맞다며 인정하는 것은 어렵다.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여겨서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 모자란 부분을 인정하기 싫어서인 이유가 컸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장단점이 존재한다.
사실 단점을 나쁘게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단점을 반대로 생각해보면 장점이 될 때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평소 소심한 내 모습을 큰 단점으로 여기며 살아왔다. 누군가 내게 너 왜 이렇게 소심하냐고 이야기하면 빨간 버튼이 눌린 듯 욱 하곤 했다. 아마 내 안의 가장 싫은 모습을 들켰기 때문 일 것이다. 이 단점을 들키고 싶지 않았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더 큰 부정이 더 큰 단점으로 자라났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이 단점을 아무리 숨겨도 가려지지 않는 내 본성 때문에 나는 매사 그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 어깨에 긴장을 한시도 내려놓은 일이 없었다. 그런 내 모습을 아셨는지 내 선임께선 꼼꼼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점이 내 큰 장점이라며 칭찬 해 주신 일이 있었다. 나는 평소 소심한 탓에 실수하고 싶지 않았고 실수하지 않으려 더 꼼꼼히 성실하게 일 해온 것이었다. 왜 나는 단점의 좋은 점을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어떤 내 모습이든 그것을 부정할수록 나쁜 감정이 자라난다. 단점이 장점이 되기도 하며 장점이 도리어 단점이 될 때도 있다. 우리는 우리의 그 모습 자체를 그대로 바라보며 그 자체로 인정해야 한다. 그대로 모든 걸 인정하면 내 모습을 깊이 관찰할 수 있다. 그 깊은 관찰은 나를 더 발전시키는 계기가 된다. 그래서 나는 내 모든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받아들이니 예전보단 내 자신이 더 좋아졌다.
한 번쯤은 내 단점을 좋은 점을 바꾸어 생각해보고 그 모습을 내 스스로 온전히 이해시키는 경험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모든 게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