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아무 날이 아니지 않도록
어떤 날은 생일이었지만,
누구도 기억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호는,
어느 날이 아무 날이 되지 않도록
작은 선물을 준비했다.
“자 모두 여름방학 잘 보내렴. 숙제 꼭 해오고, 자율숙제는 해오면 좋아.
적어도 아시안게임 포스터 하나는 그려와.”
‘1986’ 숫자 위로 태극문양의 축구공이 하늘로 솟구치는 장면이 정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일기와 독후감 그리고 탐구생활은 의무숙제였다.
아시안게임 포스터 그리기는 자율숙제였다.
하지만 정호는 스케치북도, 포스터물감도, 붓도 없었다.
자율숙제는 안 해도 되는 숙제가 아닌, 할 수 없는 숙제였다.
머릿속을 날아오르던 축구공은, 금세 방학이 끝난 교실 풍경으로 바뀌었다.
친구들의 포스터로 가득 찬 교실 뒤 풍경, 정호의 것만 없었다.
학교를 나서자, 할 수 없는 자율숙제에 대한 걱정은 금방 사라졌다.
방학식은 오전에 끝났고, 정호는 괜히 가슴이 설렜다.
학교를 가지 않을 뿐, 기대할 일이 없는 여름방학이었다.
그렇지만 점심을 굶고 운동장 가장자리를 서성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것만으로 여름방학은 정호에게 특별했다.
집으로 가는 길, 학교 앞 문구사에는 벌써 방학숙제 용품을 팔고 있었다.
잠시 멈춰 포스터 그리기 세트를 바라보았다.
스케치북이 200원, 10색 포스터물감이 500원, 그리고 붓 5종세트가 300원.
세트가 1,000원이었다.
배에서 꾸르륵 소리가 나자 집으로 발길을 떼었다.
아버지가 오늘은 일당을 구해 집에 계시지 않길 바랐다.
골목을 돌아 올려다보니 두호의 친구 민재가 집 앞에 있었다.
“형, 두호형 없는데…”
“알고 있어.”
두호가 집을 나간 지 한 해가 되었다.
“네 형이 니 생일선물로 운동화를 보냈어.”
민재가 주황색 박스를 내밀었다.
“형이요?”
형이라는 이야기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일선물요?”
손에 놓인 낯선 상자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미간을 모으며 ‘프로월드컵’이라고 쓰인 박스를 살펴보았다.
마치 진짜 주인을 찾아줄 수 있는 단서를 찾으려는 듯.
정호는 자기의 생일이 언제인지 몰랐다.
기억받지 못한 날들은, 그렇게 아무 날처럼 지나가곤 했다.
그래서 처음 받아본 생일선물과 생일을 연결시키지 못했다.
가족 생일은 글을 몰랐던 할머니의 마음속 달력에만 있었다.
아버지는 초파월 초이튿날.
두호는 유월 스무나 흩날.
정호는 초파월 스무나 흩날.
어느 날 아침상에 홍합미역국이 올라오면 가족 누군가의 생일이었다.
손주들 생일이면 할머니는 품속 돈보에서 동전을 꺼내 손에 쥐어주었다.
할머니를 둘째 고모가 모셔 간 후 가족은 생일을 챙기지 못했다.
따뜻한 미역국과 동전 몇 개만으로 행복했던 생일조차 잊어야 했다.
그날은 서로에게 미안한 감정을 갖게 할 뿐이었다.
생일은 상처의 굳은 딱지를 들어 올리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집에 계시지 않았다.
정호는 앉은뱅이책상 위에 신발박스를 두고 조심히 열었다.
고무냄새가 확 올라왔다.
얇은 종이에 신발이 하나씩 감싸여 있었다.
종이를 벗겨내자 하얀 운동화가 빛나고 있었다.
옆면에는 ‘W’ 글자가 크게 검은색 가죽으로 덧대여 있었다.
뒤꿈치 바깥 부분은 검은색 바탕에 흰색으로 ‘worldcup’이라고 쓰여 있었다.
신발에서 본드 냄새가 은은하게 올라왔다.
형과 함께 조그만 튜브본드를 짜며, 처음 만든 로봇 장난감 ‘철인28호’가 떠올랐다.
정호의 서툰 손엔 본드가 가득 묻었고,
형은 정호의 손에서 굳은 본드를 살살 떼어 주었다.
‘철인28호’는 형이 자기 생일에 받은 돈으로,
오히려 정호를 위해 사줬던 조립장난감이었다.
박스 바닥에 종이 한 장이 반듯하게 접혀 있었다.
형의 편지였다.
줄도 안 그어진 종이에 자를 대고 쓴듯한 바른 글씨체였다.
‘정호야, 늦었지만 생일 축하해!
학교 안 빠지고, 양치질 잘하고 있지?
형이 돈 많이 벌어서 빨리 갈게.
정호 많이 보고 싶어!
사랑하는 형이.’
정호는 박스에 신발을 넣고 천천히 닫았다.
편지를 다시 한번 읽고 책상에 두었다.
팔로 박스를 감싸며 엎드렸다.
얼굴을 옆으로 가만히 박스에 대었다.
신발박스의 냄새가 낯설지 않았다.
“형…”
주황색 박스 위로 눈물이 진하게 번졌다.
신발 공장에 점심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서로 엇갈리며 겹치던 생산라인의 규칙적인 소리들이 일제히 가라앉았다.
그리고 대신 젊은 목소리들의 활기가 떠올랐다.
“두호야, 니 오늘 생일아이가? 명부 보니까 그렇던데.”
구내식당에서 줄 서 있던 두호에게,
접착라인 라인장이 슬쩍 다가와 툭 말했다.
두호는 마른 본드를 떼던 손을 멈추고 라인장을 바라보았다.
이날 6월 24일이 자신의 열여덟 번째 생일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
“이모, 오늘 두호 생일이라꼬. 좀 챙겨주이소.”
라인장이 식당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아이고, 오늘 잘 생긴 두호 생일이가? 그라모 맛난 거 줘야지.”
이모는 활짝 웃으며 두호 식판에
간부들에게만 나가는 계란 프라이 두 장을 얹어주었다.
순간 두호는 지나가버린 4월 24일 정호의 열 번째 생일이 떠올랐다.
두호는 업무가 끝나고 포장라인의 라인장을 찾아갔다.
동생에게 보낼 신발을 꼼꼼히 직접 골랐다.
기숙사 창문 너머,
초승달이 가늘게 웃으며 떠 있었다.
신발박스 위에 종이를 올려놓고 펜을 들었다.
두호는 하고 싶은 말이 마음속에서 쏟아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 글자도 쓸 수 없었다.
가슴이 먹먹했다.
정호에게 슬픔을 전하고 싶진 않았다.
멀리 있어도, 형은 여전히 든든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마음을 꾹 눌러 담고,
명랑하고 짧은 인사말부터 적기로 했다.
‘정호야…’
첫 글을 쓰자, 눈물이 툭, 상자로 떨어졌다.
1년 전, 두호가 고등학교 첫 학기를 마친 방학식 날이었다.
수업 없이 오전 일찍 끝난 학교는 고요하였다.
두호는 선생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 교실에 남아 있었다.
책상 위의 성적표와 수업료 고지서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 위에 손을 얹고, 오른손 검지로 천천히, 한참을 두들겼다.
그러다 성적표와 고지서를 포개어, 양끝을 단단히 쥐었다.
잠시 멈칫했지만, 곧 망설임 없이 가운데를 힘껏 찢었다.
‘쫘악-’
찢긴 종이를 그대로 책상 서랍 안으로 던져 넣었다.
두호는 아무것도 챙기지 않고 교실을 나왔다.
교무실로 향하지 않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바로 교문으로 향했다.
교문을 나서기 전, 두호는 빈 운동장을 돌아보았다.
메마른 바람이 황갈색 먼지를 단상 쪽으로 몰았다.
국기 없는 게양대가 외롭게 서있었다.
철제 게양대의 느슨한 끈이 바람에 흔들리며
속 빈 기둥을 두드렸다.
‘텅’하는 금속성의 울림이 운동장에 퍼졌다.
그 울림은, 마치 무언가가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 같았다.
“형 부산으로 일하러 갈 거야. 아버지한테는 아무 말하지 마.”
정호는 왜 형이 일하러 가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형이 떠나지 않기를 바랐다.
할머니가 먼저 떠났고 일 년 가까이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까닭 없이 마음이 불안했고 눈물이 흘렀다.
“형, 가지 마요.”
정호는 형의 가방을 살며시 붙잡았다.
“이제 그만 올라가.”
정호는 아랫동네까지 형을 따라 내려왔다.
형의 가방을 꽉 붙잡았다.
“너 형 말 안 들을 거야!”
두호는 소리를 높이며 정호의 손을 가방에서 떼어냈다.
“너 여기서 더 따라 내려오면 정말 형이 때릴 거야.”
정호는 서럽게 몸을 떨었다.
형이 자신을 때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매일 두들겨 맞더라도 형이 곁에 있길 바랐다.
두호는 정호를 단 한 번도 때린 적이 없었다.
정호를 때리고 싶은 적도 없었고,
매를 들지 않아도 항상 형을 잘 따르던 동생이었다.
두호는 정호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았다.
“울지 마. 형이…”
두호는 어린 정호에게 무엇을 설명할 수도, 약속할 수도 없었다.
“형은 좋은 일 생겨서 잠깐 떠나는 거야.
정호하고 떨어지는 건 속상하지만 형에겐 좋은 일이야.
떨어져 있는 동안 항상 정호를 생각할 거야,
너도 형 항상 생각하며 씩씩하게 지내면 돼. 알았지?”
두호는 눈물 가득한 정호의 눈을 내려다보았다.
서러움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하지만 이를 꽉물며 동생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제 올라가.”
두호는 정호를 살짝 돌려세우더니,
등을 다정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밀었다.
“이제 돌아보면 지는 거야. 올라가. 형 갈게”
정호는 몇 걸음 올라가다, 멈춰 선 채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두호는 절뚝이며 뛰어내려 가고 있었다.
뒷모습이 점점 멀어졌다.
정호는 그 자리에 서서 형이 큰길 모퉁이로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두호는 끝내,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정호는 신발박스를 소중하게 들어 나일론 옷장 안쪽에 두었다.
갑자기 잊고 있었던 허기가 올라왔다.
어제 마지막 남은 쌀로 밥을 해놓은 냄비의 뚜껑을 열었다.
쉰내가 약간 올라왔다.
더워진 날씨는 하루도 지나기 전 밥을 상하게 하였다.
조심히 냄비를 한쪽으로 기울이니
약간 탁하고 연한 노란 물이 냄비 모서리로 고였다.
그 물을 따라내고 누렇게 묽어진 밥알들을 골라냈다.
밥에 물을 부어 곤로에 불을 붙여 끓였다.
찬장에서 조선간장이 담긴 소주병을 꺼냈다.
종지에 간장을 따랐다.
표면에 얇게 핀 하얀 곰팡이들이 표면에 떠올랐다.
검지로 조심히 곰팡이들을 걷어냈다.
누룽지처럼 끓인 밥과 간장 종지를 들고 앉은뱅이책상에 앉았다.
숟가락을 종지에 살짝 담갔다 밥 위에 한 방울 떨어트렸다.
검은 간장이 부드럽게 천천히 번졌다.
그 부분을 숟가락으로 깊게 넣어 떠서 먹었다.
짠 조선간장의 맛이 입에 퍼졌다.
오물오물 천천히 밥을 씹으면 단맛이 올라왔다.
허기가 가시기 시작했다.
정호는 배를 채우고 집을 나섰다.
동네 뒷 산 장군산을 올랐다.
비탈길을 따라 오르며 지천에 깔린 산딸기를 따먹었다.
장군바위에 올라 멀리 여수 가막만을 바라보았다.
땀이 식으며 으스스 한기가 올라왔다.
정호는 장군바위의 오른쪽 반대길로 산을 내려갔다.
그 길은 옆동네로 가는 길이지만 가는 길에 버려진 과수원이 있었다.
앵두나무와 자두나무가 버려진 과수원에 아무렇게나 자랐다.
반정도 붉게 익은 자두를 골라 따서 챙겨간 얇은 나일론 등가방에 담았다.
산에서 내려와 옆동네로 들어서자 한 곳에 일꾼들이 보였다.
원래 밭이었던 곳에 터를 닦아 집을 짓고 있었다.
한 일꾼이 지게에 벽돌을 지고 올라왔다.
벽돌을 쌓아둔 곳 몇 걸음 앞에서 기우뚱하더니 옆으로 넘어졌다.
정호는 자신도 모르게 넘어진 일꾼에게 뛰어갔다.
일꾼을 부축해 일어나는 걸 도왔다.
그리고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떨어진 벽돌을 쌓아둔 곳으로 옮겼다.
벽돌은 서로를 붙잡으며 지그재그로 엇갈려 쌓여 있었다.
정호는 잠시 그 순서를 눈으로 훑었다.
약간은 비뚤 했지만 벽돌을 하나씩 옮겨 올렸다.
“아이고 기특한 놈, 이 동네 살아? 일 잘허네. 잠깐 일 좀 도와줄래?”
반장으로 보이는 일꾼이 정호에게 말을 붙였다.
정호는 지게꾼들이 벽돌을 지고 올라오면 내려서 쌓는 걸 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군산 뒤로 해가 넘어갔다.
“자 이거 일당이야, 그리고 이건 넘어진 아저씨 도와준 값.”
반장은 정호에게 오백 원 동전 하나를 주고 백 원 동전을 또 건넸다.
“감사합니다.”
정호는 기대하지 않았던 큰돈에 눈이 동그래졌다.
정호는 아랫동네 슈퍼를 들렀다.
그곳에서 고구마깡 하나와 삼양라면 5개를 샀다.
왼쪽 겨드랑이에 라면 봉지를 끼웠다.
왼손에 고구마깡을 들었다.
오른손으로 과자를 하나씩 빼먹으며 집으로 향했다.
이마는 먼지를 뒤집어써 까맣고 땀 흐른 자국이 군데군데 있었다.
코아래는 손을 훔친 자국이 누렇게 남아 있었다.
물 빠진 노란색 반팔 가슴엔 땀이 하얗게 마른 자국이 있었다.
손가락 사이엔 벽돌가루가 아직 남아 있었다.
하지만 정호는 지저분한 자신의 모습이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정호는 활짝 웃었다.
아버지는 매일 아침 일찍 일당을 구하러 나가셨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왔을 때,
아버지가 계시면 그날은 일당을 구하지 못한 날이다.
대부분 그러했다.
오늘처럼 일당을 구한 날은 아버지는 늦게까지 집에 오지 않았다.
정호는 산동네로 올라오는 여러 길 중 가장 큰 길목에서 아버지를 늦게까지 기다렸다.
나무전봇대에 매달린 골목등 노란 불빛 아래에서 나뭇가지로 흙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발바닥으로 몇 번이고 지우고 다시 그렸다.
문득 아버지가 다른 길로 집에 먼저 갔나라는 생각이 들면
기대감이 살짝 일어 집으로 올라가 확인하곤 했다.
건너 종고산의 산등성이에 불러가는 반달이 예쁘게 걸쳐 있었다.
산동네 가족들의 웃음이 잦아들고 골목등 아래 날벌레들의 울음이 커졌다.
정호는 아버지가 자주 가는 아래 동네의 선술집으로 향했다.
무열이 아저씨네 아니면 더 아래 샘슈퍼에 계시길 바랐다.
아버지는 무열이 아저씨네에서 술을 드시고 계셨다.
“아들 데리러 왔네. 이제 가. 가게도 닫아야지.”
무열이 아저씨가 입구에 서있는 정호를 한 번 바라보고 말했다.
“형님, 막걸리 한 병만 가져갈게요.”
“그만 먹어. 오늘 받은 오천 원 빼도 아직 외상값이 남았어.”
잠시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에효…, 알량한 자존심 세우지 말고
생활보호대상자 신청해서 쌀이라도 받아먹어야지.
애 굶겨 죽일 작정이야? 통장한테 내가 말해줄게.”
무열이 아저씨가 아버지를 타이르듯 말했다.
“애가 빼짝 말라가지고, 삼혜 고아원 애들이 더 낫지. 이 이쁜 거를…”
무열이 엄마가 정호의 손에 옥수수빵을 쥐어주며 말했다.
눈은 따듯하게 정호를 바라보았지만 아버지를 향한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정호는 아침 일찍 아버지가 나가시기 전에 라면 세 개를 끓였다.
단 두 식구가 오랜만에 함께 하는 아침밥이었다.
정호는 아버지가 나가신 후 신발박스를 꺼냈다.
신발을 꺼내 책상에 두고 잠시 바라보았다.
생일선물, 형의 마음이 느껴져 입꼬리가 올라갔다.
정호는 문득 잊고 있던 게 생각났다는 듯이 일어났다.
신발을 박스에 담아 나일론장에 넣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어….”
정호는 말꼬리를 흐리며 우물거렸다.
“오늘도 일 도우러 왔어? 이리 와.”
반장이 환하게 웃으며 맞아주었다.
정호는 반장을 따라다니며 일을 도왔다.
바닥에 먹줄을 칠 때 팽팽하게 끝을 잡았다.
시멘트를 발라 벽돌을 올릴 때 미리 벽돌을 준비했다.
철판 위에 시멘트를 갤 때 우물에서 물을 길어왔다.
일은 그리 힘들지 않았고 반장은 정 많은 사람이었다.
반장은 일이 끝나면, 일꾼들에게 일당을 지급했다.
업무별로 오천 원에서 팔천 원 사이의 돈을 주었다.
그리고 정호에게도 천 원짜리 지폐를 쥐어주었다.
그렇게 나흘이 지나니 산동네 무허가 단층집이 세워졌다.
마지막 날 반장은 정호에게 오천 원짜리 한 장을 주었다.
“특별 보너스야. 일도 잘하고 자알 생겨갖고 잘 될 놈이여.”
반장은 일꾼들을 돌아보며 동의를 구하듯 웃으며 말했다.
일꾼들도 정호에게 미소를 보냈다.
여러 어른의 따뜻한 얼굴에 정호는 왜인지 마음이 뜨거워졌다.
정호는 자꾸 팔로 얼굴을 훔쳤다.
“이눔아 울지 말어. 지금처럼 착하고 부지런하게 살어.
그럼 어떻게든 살아질 것이다.”
반장은 정호의 등을 토닥였다.
정호는 무열이 아저씨네 가게로 향했다.
“정호야, 왜 이렇게 시커메? 아이고 일루 와 좀 씻자.”
무열이 엄마가 가게로 들어서는 정호를 보며 말했다.
“여기 팔천 원 외상값….”
반듯하게 접은 지폐를 아주머니에게 건넸다.
정호가 나흘동안 번 돈이었다.
“아빠가 보냈어? 저번에 갚은 게 있어서 돈이 많이 남는데?”
아주머니는 눈을 크게 뜨며 몇 번이고 외상장부를 확인했다.
“6,300원이나 남는데, 뭐 살 거 있어? 아니면 거슬러줄까?”
정호는 잠시 손가락으로 셈을 하며 고민을 했다.
“솔 담배 한 보루랑 막걸리 한 병, 그리고 라면 5개 사고 이거 하나 살게요.”
정호는 고구마깡을 손에 들며 아주머니에게 이야기했다.
“솔 한 보루 4,500원, 막걸리 200원, 라면 5개 500원, 과자 하나…
외상값 1,700원, 천 원 거슬러 주면 딱 맞네.”
아주머니는 천 원짜리 하나를 정호에게 돌려주었다.
“어유, 느그 아빠도, 쌀을 사든지 해야지, 담배 한 보루가 뭐야…
부끄러운 줄은 알아서 니를 보냈냐?”
아주머니는 신문을 보는 무열이 아저씨를 한 번 힐끗 보더니,
라면을 담은 봉지에 보름달빵을 몰래 넣어주었다.
“어서가.”
아주머니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정호를 서둘러 내보냈다.
왼쪽 겨드랑이에는 솔 담배 한 보루를 끼웠다.
라면을 담은 비닐봉지를 손목에 걸고 과자를 먹으며 집으로 향했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천 원 지폐가 잘 있는지 자꾸 확인했다.
태극문양의 축구공이 하늘로 치솟는 장면이 다시 떠올렸다.
정호의 보조개도 선명히 피어났다.
오늘도 아버지는 집에 계셨다.
정호의 인기척이 들리자,
아버지는 고개를 들고 방문을 바라보았다.
단칸방 문을 열자마자,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하루 종일 어디 있다가 이렇게 늦게 오는 거야?”
표정은 조금 굳어 있었지만,
말투엔 화보다 걱정이 먼저 배어 있었다.
“아버지, 이거 선물…”
정호는 솔담배 한 보루와 막걸리를 앉아 계신 아버지 앞으로 밀었다.
“무슨 선물?”
아버지는 정호와 담배 그리고 막걸리를 눈을 크게 뜨고 번갈아 보았다.
“생일 선물요.”
“생일이 지난 지가 언제인데, 네가 내 생일을 어떻게 알아?
그리고 이게 다 어디서 났어?”
어이없다는 듯 웃다가, 곧 진지한 얼굴로 되물었다.
“과수원 아래 동네, 집 짓는 곳에서 4일 동안 일 도와드리고 받은 돈으로 샀어요.”
며칠째 정호는 온몸에 때 국물을 묻히고 돌아왔다.
아버지는 그저 산에서 친구들이랑 연탄재 뒤집어쓰며 놀다 온 줄 알았다.
알아서 씻고 말이 없으니, 별말 없이 넘겼다.
그런데 오늘, 아버지는 오늘 그 이유를 알았다.
“이 자식아 누가 그런 데서….”
아버지는 말을 잇지 못했다.
숨을 참고, 꽉 쥔 주먹을 방바닥에 가만히 꾹꾹 눌렀다.
기를 쓰고 붙잡고 있던 마지막 울타리가, 그 순간 무너진 것 같았다.
“아버지 생일이 초파월이라고 할머니가 나랑 같은 달이라고 하셨어요.
언제인지 몰라도 아버지가 태어난 날이 있으니까.”
언제인지 몰라도 정호는 기억하고 싶었다.
형과 아버지의 태어난 날을.
그냥 어느 날이라도 하루는 아무 날이 아닐 수 있도록.
“아버지, 생일… ”
정호는 입술을 달싹이며, 한참을 망설였다.
"축하해요."
말끝이 닿기도 전에, 아버지의 눈물이
담배보루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아버지는 고개를 들어 정호를 바라보았다.
단칸방 천장에 매달린 노란 전구가 정호의 눈에 맺혀있었다.
부드럽게 젖은 깊은 눈동자는, 더 이상 아이의 것이 아니었다.
그 눈은 아버지를 '아버지'가 아닌, 가슴 아린 한 사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정호는 부엌 바닥에 앉아 몸을 씻었다.
세수대를 기울여, 까매진 물을 비웠다.
잠시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쉰 뒤 천천히 내쉬었다.
구석의 수채구멍으로 탁한 물이 흘러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움과 서러움도 함께 씻겨나가는 것만 같았다.
정호는 고개를 들어 문밖을 보았다.
열어놓은 부엌문 너머,
멀리 걸린 반달이 조용히 자라고 있었다.
얼마 전, 형이 바라봤을지도 모를 그 달.
정호는 믿었다.
'어딘가에서, 형도 지금... 저 달을 함께 보고 있을 거야.'
지나온 시간 속, 마음 깊은 이야기들.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기록합니다.
매일의 삶, 지나온 기억, 그리고 작고 소중한 온기들.
이야기의 다음 장은 곧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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