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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스한 골방 Jan 03. 2024

튼튼한 독립은 따뜻했던 의존에서 시작해요

마거릿 말러의 분리-개별화 과정


  바로 이전 글에서 의존과 독립 사이에서 건강한 사람을 설명했어요. 오늘은 그림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해요. 위의 그림을 한번 살펴볼까요. 초록색 세로선은 의존-독립 사이의 중간 지점이에요. 초록색 세로선으로부터 왼쪽으로 많이 갈수록 의존적인 사람이고, 반대로 오른쪽으로 많이 갈수록 독립적인 사람이에요. 그리고 건강한 사람이라고 표시한 초록색 가로선의 범위를 벗어나면 지나치게 의존적이거나 독립적인 사람이에요. 반대로 건강한 사람의 범위 안에 있다면 의존적인 성향이든 독립적인 성향이든 모두 건강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상당히 의존적인 사람 A는 건강한 사람의 범위를 벗어난 빨간 선에 위치하고, 조금 독립적인 사람 B는 건강한 사람의 범위 안에 있는 파란 선에 위치해 있어요. 이처럼 우리도 이 그림의 어딘가에 위치해 있을 거에요. A처럼 지나치게 의존적이어서 고민이신 분이 있다면, 이번 글이 스스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실 수 있어요.


  이 글에서는 마거릿 말러(Margaret Mahler)의 분리-개별화 과정(separation-individuation process)을 설명하려고 해요. 분리-개별화 과정은 출생 후부터 생후 36개월 동안 엄마로부터 전적으로 의존해 오던 아이가 독립해 가는 과정이에요. 앞서 보여드렸던 그림으로 치면 맨 왼쪽에 있던 아이가 중앙쪽으로, 즉 건강한 사람의 범위로 성장해가는 과정이에요. 이 36개월은 크게는 3개의 시기로 나뉘기도 하지만 작게는 6개의 시기로 나눌 수도 있어요. 여기서는 6개의 시기로 나누어서 설명해 볼게요. 이야기가 너무 길다고 느껴진다면 네 번째~여섯 번째 시기 위주로 읽으셔도 좋아요.


   번째 시기는 정상 자폐기라고 해요. 출생 후부터 생후 1개월까지의 시기에요.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들이 위치한 시기입니다. 이때의 아이들은 세상에 나온 지도 얼마 안 됐고, 인지능력도 제대로 발달되지 못한 상태예요. 그래서 아이는 자신 외의 존재들을 알아챌 수도 없고 관심도 없어합니다. 여기서 엄마도 예외가 될 수 없어요. 이 시기의 아이는 엄마를 포함해서 타인과 의미 있는 상호작용을 전혀 하지 못합니다. 비록 정상적인 과정이긴 하지만, 타인과의 상호작용에 관심 없어하는 모습이 자폐적 특성과 비슷하기에 이 시기는 정상 자폐기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이 시기는 나중에 분리개별화 과정에서 빠지기도 했던 시기이기도 하고, 또한 다른 시기에 비해서는 크게 중요하지는 않은 시기이기도 해서 가벼이 읽어주셔도 될 것 같아요.


  두 번째 시기는 공생기라고 해요. 생후 1개월부터 생후 5개월까지의 시기에요. 인생 1개월 차인 아이들은 자신 외의 존재들에 대해서 조금씩 관심을 가지기 시작해요. '나'와 '내가 아닌 것'을 구분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자신이 배고플 때 기꺼이 가슴을 물려주는 엄마를 보면서 웃기도 합니다. 누군지도 모르지만 엄마로부터 행복함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기에, 의도치는 않았지만 타인에게도 감정적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는 거죠. 하지만 여전히 아이는 어머니에게 전적으로 의존을 해야만 하는 상태고, 엄마는 비정상적으로 아이에게 몰두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비정상적이라고 표현을 하기는 했지만 사실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어요. 갓난아기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어린아이에서 잠시라도 한눈을 떼면 혹시나 어떻게 될까 걱정스러운 것이 당연하니까요. 이런 아이와 엄마의 사연들이 맞물려서, 아이와 엄마는 마치 공생하는 관계처럼 보이는 시기입니다.


  번째 시기는 분화 분기에요. 생후 5개월부터 생후 9개월까지의 시기죠. 아이가 생후 5개월이 되면 일정 수준으로 감각이 발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시기의 아이는 자신 외에 존재하는 주변 사물에도 관심을 가져요. 이제 아이는 주변 환경을 탐색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아이가 드디어 낯가림을 보이기 시작해요. 낯가림은 얼핏 보면 아이가 사람들을 불편해하는 것 같아 걱정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낯가림은 엄마와 낯선 사람을 구분할 수 있다는 신호라서 낯가림이 전혀 없는 것도 걱정되는 일이기도 해요. 적당한 낯가림은 오히려 아이가 잘 성장하고 있다는 좋은 신호입니다.


  네 번째 시기는 실습 분기에요. 생후 9개월부터 생후 16개월까지에요. 드디어 아이가 기어 다니더니 어느새 걷기 시작해요. 이제 아이는 엄마로부터 떨어져서 자율적으로 이것저것 해볼 수 있어요. 신기한 게 있으면 만져보고, 먹어보고, 맡아보고 할 수 있어요. 아이 입장에서는 그동안 신기하게 봐왔던 것들을 직접 실습하는 것이 정말 즐거운 시간일 수밖에 없어요. 또한 새로운 것들을 처음으로 성공시키는 과정이기 때문에 자기애가 최고조로 도달해 있는 시기이기도 해요. 하지만 꼭 즐거운 일들만 있는 건 아니에요. 독립을 시작해 보면서 엄마를 떠나 있는 시간을 잠시나마 겪어야 하거든요. 엄마와 떨어져 있던 아이는 곧 불안해지고 다시 엄마에게 돌아와서 사랑을 확인해요. 그리고 사랑을 채운 아이는 신이 나서 다시 엄마를 떠나요. 이처럼 엄마에게 독립하고 의존하기를 반복하는 과정을 재급유(refueling)이라고 해요. 이 과정이 우리가 자동차를 운전하다가 기름이 떨어지면 주유소를 찾아 기름을 다시 채우는 것과 비슷하거든요. 참 재밌고 알맞은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기의 어머니가 주는 충분한 애정이 아이의 독립을 위한 여정의 연료가 되는 것이니까요.


  다섯 번째 시기는 화해접근 분기에요. 생후 16개월부터 24개월까지의 기간이에요. 엄마와의 분리가 익숙해진 아이는 점차 행동반경은 넓어지고 엄마의 제지를 받는 일도 많아져요. 아이의 자율성과 엄마의 통제가 충돌할 수밖에 없는 시기에요. 이때를 우리는 미운 세 살이라고 하고, 영어로는 terrible two(끔찍한 두 살)이라고도 해요.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이 시기의 어머니들이 느꼈을 고민들이 전달되는 단어들이에요. 아이가 나이를 먹으며 점점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아져 힘드시겠지만, 아이가 하지 않아야 할 행동들은 막아주는 것이 건강한 어머니의 역할이에요. 다만 이때 피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가 있어요. 아이는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엄마를 매우 나쁜 엄마(all bad mother)라고 느껴요. 반대로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면 매우 좋은 엄마(all good mother)라고 느끼죠. 같은 엄마지만 때에 따라 좋기도 하고 나쁠 수도 있다는 것은, 이때의 아이가 받아들이기에는 가혹하고 어려운 이야기에요. 그래서 아이가 깨달을 때까지 엄마는 아이에게 안 되는 것을 일관되고 따뜻하게 알려줘야 해요. 아이의 건강한 독립을 위해 엄마의 꾸준한 공감과 인내가 필요한 시기에요.


  여섯 번째 시기는 대상항상성이 형성되는 시기에요. 생후 24개월부터 36개월까지의 기간이에요. 아이는 엄마가 나의 요구를 항상 들어주지는 않아도 늘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매우 나쁜 엄마, 매우 좋은 엄마와 같이 극단적인 엄마가 아니라 적당히 좋은 엄마라는 현실을 깨닫게 된 거에요. 이제 아이는 자신의 마음속에 적당히 좋았던 엄마의 따뜻한 모습을 간직하려고 해요. 그렇게 되면 아이는 현실의 엄마가 나를 혼내는 순간에도, 다음과 같이 마음속의 엄마를 떠올리며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게 되거든요.


지금 나를 혼내고 있는 엄마가 나를 싫어하는 것 같아서 불안해.
하지만 엄마는 늘 나를 사랑했어.
그러니까 나도 엄마를 믿고 덜 불안해할 거야.


  그래서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아이는 대상항상성(object constancy)을 가지고 있는 건강한 아이에요. 대상항상성은 힘든 상황이 와도 대상(여기서는 엄마)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잘 기억할 수 있는 것을 뜻하거든요.

이렇듯 대상항상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사랑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이 있어요. 내 곁에 당장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없더라도 스스로의 마음에 의지하면서 역경을 버텨낼 힘이 있어요. 마음속의 따뜻한 엄마가 없다면 심리적 독립을 이룰 수 없어요. 역설적일 수도 있겠지만, 건강한 독립은 엄마에게 의존했던 따뜻한 기억에서 와요.


  적당히 좋은 어머니가 아닌 어머니의 품에서 자랐던 사람도 독립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주변에서 적당히 좋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줬던 따뜻함을 감사한 마음으로 기억하려고 노력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정신과 의사나 임상심리상담사가 적당히 좋은 사람이 되어서 독립을 향해 나아가는 경우도 있어요. 자신이 너무 의존적인 것 같아 걱정되시는 분들은 나의 마음을 한번 살펴보셔요. 만약 공허하게 느껴지는 빈자리가 있다면 언젠가 따뜻한 추억으로 채울 수 있기를 바랄게요.




  혹시나 있을 수도 있는 오해를 막기 위해서 첨언합니다. 이번 글은 독립과 의존 중에서 어떤 것이 낫다는 맥락으로 쓴 글이 아닙니다. 맨 처음에 보여드렸던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건강한 성격의 범위 안이라면 의존-독립 문제에 한해서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 사람들마다 조금의 편차는 있을 수 있고, 그 편차가 건강하다고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이라면 괜찮은 일입니다.


  매우 좋은 엄마, 매우 나쁜 엄마는 개인적으로 어려운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어려운만큼 중요한 개념이라고 생각하는데요, 혹시 이 부분을 더 이해하고 싶은 분은 아래 글을 함께 보시면 좋을 것 같아 소개합니다. 오늘도 제 글을 찾아주셔서 감사해요.


https://brunch.co.kr/@warmsmallroom/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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