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마살 이야기 9 Russia, Irkutsk
신경쓰지 말아야지
신경쓰지 말아야지
신경쓰지 않는 것에
신경쓰고 있잖아!
-하상욱의 '서울시 2' 중에서
새벽 4시가 되어 도착한 몽골 공항은 과연 이곳이 정말 공항이 맞는지 헷갈렸을 정도로 아무도 없이 적막만이 감도는 곳이었다. 드문 드문 몇 개의 전등이 켜있었지만, 그마저도 적막하다 못해 으스스한 느낌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장시간의 이동과 새벽의 느끼는 피로함으로 잠깐의 당황스러움을 주었을 뿐, 곧이어 공항 안으로 들어가 적당히 구석지고 너무 후미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은 채 가방을 베고 누웠다.
오늘 나는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에서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 가야 한다. 내가 예약한 항공권은 모스크바를 가기 위해 이르쿠츠크를 경유해서 가는, 즉 직항보다 좀 더 저렴한 항공권이었다. 비행기 출발시간은 오전 6시 20분이여서 미리 준비 좀 할겸 가방 안에 있는 E-티켓과 여권을 꺼내었다. 그리고 E-티켓을 확인해보니 환승지인 이르쿠츠크에서 환승할 수 있는 시간이 고작 1시간 10분밖에 되지 않았다. 재차 확인해봤지만 정확히 1hour 10이라는 표시는 변하지 않았고, 그것은 70분이라는 아주 짧은 환승 시간을 의미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날짜에 맞춰 티켓을 예매하기만 했지 환승하는 시간을 확인해야 한다는 것은 생각하도 못했다. 급하게 떠나온 탓에 꼼꼼히 챙길 여력이 부족했고, 오로지 저렴한 것에만 몰두하다 보니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만 셈이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몇몇 직원들이 출근을 하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탑승 수속을 위해 티켓 카운터로 향했고, 여권을 제시하자 카운터 직원은 컨테이너 벨트에 가방을 올리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나는 환승 시간이 부족하니 직원에게 나의 배낭을 비행기로 반입하겠다고 말했지만 규정상 큰 가방은 기내로 반입할 수 없다고 했다. 혹시라도 비행기를 놓치지 않을까 해서 계속 바득바득 우겨봤지만 영어로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는 우리는 말을 하면 할수록 서로 답답함만 늘어갈 뿐이었다.
그리고 직원은 나에게 "Time enough"를 반복하며 환승 시간이 충분할 것이라고 했다. 걱정에 대한 걱정은 계속되었지만 카운터 직원이 설마 없는 소리 하지는 않겠지 생각하며 짐을 수하물을 통해 나의 짐을 보내기로 했다.
곧이어 비행기는 경유지인 러시아의 이르쿠츠크에 도착했고 재빨리 입국도장을 받아 수하물을 찾는 곳으로 갔다. 그러나 급하고 초조한 내 마음과는 달리 컨베이어 벨트는 세월아 네월아 세상 느리게 꾸물꾸물 굴러가기만 했다. 당장이라도 벨트의 끝자락을 확 잡아당겨내고 싶은 답답함이 마음 속 깊이서 가라 앉지 않았다.
잠시 뒤 컨베이어 벨트 위에 허름한 짝퉁 다우터 가방이 올라오자 재빨리 어깨에 짊어지고 “아임 모스크바 에어포트!!”를 수 없이 외치기며 모스크바로 갈 수 있는 국내선 공항으로 뛰어갔다. 다행히 모스크바로 가기 위한 국내선에 도착하고 보니 아직 30분이 남았다. 그래도 서둘러야 한다.
다시 모스크바행 티켓을 받기 위해 항공사 직원으로 보이는 아무 사람을 붙잡고 티켓을 보여주며 “모스코우, 모스코우!”를 외쳤다. 하지만 냉정하게 “고 인포메이션”이라는 답만 돌아왔다. 재빨리 인포메이션 데스크에 가서 나의 티켓을 보여주고 “모스코우, 모스코우 패스트 플리즈! "를 외쳤다.
그런데 이게 왠걸, 인포메이션에서 일하고 있는 그녀는 E-티켓에 적힌 영어를 읽지 못했고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만 갸우뚱했다. 티켓 카운터와 인포메이션 데스크에 가서 모스코우를 외치기를 반복하다, 이번에는 제복을 입거나 공항에서 일할 것 같이 보이는 누구에게든 가서 모스코우를 외쳤다. 그리고 촌각을 다투는 이시간에 아까 영어를 못했던 인포메이션 데스크의 직원은 느지막히 영어를 할 줄 아는 한 남성을 내게로 데려왔다.
불행히도 그의 첫마디는 ‘Unfotunately’였다.
- “불행히도 당신은 비행기를 놓쳤고 이곳에서 모스크바 티켓을 예매해야 합니다.”
아직 몇 분의 시간이 남았지만, 수하물을 부치고 항공권을 발권하고 공항검색대를 통과하는 일련의 과정들을 하기에는 늦은 시간이라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리고 멍하니 눈만 껌뻑거리는 채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비행기를 처음 놓쳐보는 상황이라 현상황에서 무엇을 해야할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대낯의 무수한 빛줄기가 사라지듯 세상이 까마득하게 변하는 것 같았다. 동시에 그간 여행을 위해 먹고 싶은 것을 참고, 사고 싶은 것을 참았던 처절했던 내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머금은 눈물은 눈가에 걸칠 듯 말듯 하며 그간의 아끼고 아꼈던 처절함과 억울함을 쏟아내려 하였다. 마치 열심히 세워나가던 도미노가 한번의 실수에 와르르 무너지듯 나의 억장 또한 격렬히 무너지는 듯 했다. 하지만 어찌됐든 이곳을 떠나야 했으니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고, 꼬깃 꼬깃 문드러진 마음을 다시 펼쳤다. 그리고 적지 않은 깡다구를 동반하여 눈물을 머금고 티켓부스에서 항공권을 새로 구매했다. 환율 어플을 통해 결제금액을 확인해보니 539,658원이었다. 양쪽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539,659원은 홀연히 나를 떠나갔다.
'그래, 교훈을 얻었다고 생각하자.'
하지만 교훈이라고 하기엔 너무 비싼 교훈이었다.
‘아니야 그래도 다시 이런 일이 없을 거니까 괜찮아.’
다시 없을 일이라면 애초에 없었어도 됐다.
계속해서 팽창하는 우주처럼 수많은 생각이 꼬리를 물고 머릿속을 이리저리 빼곡히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안되겠다싶어 하는 수 없이 잡생각들을 잊기 위해 일단 공항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하지만 바깥날씨은 멍한 정신을 번쩍들게 할 만큼 상상초월의 강추위였다. 1시간 정도를 걸었을까, 도저히 아니다 싶어 다시 공항에 돌아왔다. 그렇게 칼바람을 몸소 만끽하고선 이르쿠츠크가 시베리아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잠시 뒤 내 모습을 확인해보니 만지작거리는 두 볼은 마치 납덩이처럼 싸늘했고, 붉게 튼 살갗은 누군가에게 뺨따귀 10대는 얻어 맞은 것처럼 물들어 있었다.
공항에 돌아온 나는 할 게 없었다. 갑작스럽게 발생한 큰 지출탓에 어쩔 수 없이 긴축 재정에 돌입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허리띠는 꽉 조여 매고 공항에서 아무것도 사 먹지 않았다. 대신에 보기만 해도 엉덩이가 욱신거리는 공항의자에 앉아 몽골에서 샀던 코코넛 초콜릿을 꺼내 최소한의 배고픔만 해결했다. WIFI도 안 되고 영어도 안 통하고 돈도 날리고 시간도 날리고 체력도 날리고 배고프고 갈증도 났다. 저녁 19시 출발 비행기를 타기까지 남은 시간은 11시간, 그동안 할 수 있는 것은 금전적 지출이 필요없는 생각에 관한 생각뿐이었다.
달걀이 먼저인가 닭이 먼저인가.
인간은 성선인가 성악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행복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인간은 539,659원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내가 너무 당연하게 여겼던 것으로 인해서 너를 보내게 되었네. 막상 네가 이렇게 홀연히 떠나고 나니까 당연했던 것들이 얼마나 컸는지 느낄 수 있게 됐어. 내 곁에 있을 때 잘해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늘 곁에 있을 거라는 안심에 내가 많이 무심했어.
어쩌면 이렇게 된 것은 우리에게는 '때'가 정해져 있었을지도 몰라. 그리고 지금이 그 정해진 '때'일뿐.
다만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온 탓에 아직 실감이 안 나네. 하지만 놓아야만 하고 잊어야 하는 게 우리가 마주한 현실이야. 그러니까 더는 집착하지 않을게. 떠나버린 버스를 계속 바라보며 눈물짓는다 해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너와 함께 하는 시간 동안 내 마음은 풍성했고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어. 그리고 너와의 헤어짐은 나를 변화시켰고 성장시켰어. 지금도 네가 너무나 그립지만, 이제부터 너 없이도 혼자 살아갈 연습을 하려 해.
언젠가 시간이 흘러 웃음 지을 수 있는 시간이 찾아올 때,
너는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내 마음에 남아있을 거야.
너와 함께여서 잠시나마 행복했고 고마웠어.
그럼 이제 정말 마지막 안녕
P.S. 수수료까지 포함하니 551,885원이 되었네.
From. 전 남자주인
낭만 없는 여행 에세이 담고 있습니다.
글/ 사진_ Instagram@jongminzz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