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마살 이야기 10 Russia, Moscow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지금 이 순간을 충실히 사는 것뿐이다
- 김수현의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중에서
끝이 없을 것만 같았던 인내와 고통의 시간 뒤에 입이 닳아 없어지도록 외쳐대던 모스크바에 드디어 도착했다. 정말이지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감격의 순간이었다. 북적거리는 사라예보 공항을 보니 나름 러시아에 온 것이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감동은 꺼지고 나는 지긋지긋한 공항을 일단 벗어나고 싶었다. 공항에서 환전은 비싸니 일단 한 푼이라도 아끼겠다는 심정으로 시내로 가기 위한 최소비용 30달러만을 환전한 뒤 나머지는 시내에서 환전하기로 했다.
공항철도를 타고 저녁 20시가 넘어 도착한 시내는 뭔가 썰렁함이 가득했다. 사람 없는 음산한 저녁거리에 괜히 등줄기가 서늘해져 부지런히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다 마침 전광판에 $ € ¥ £가 표시되어 있는 환전소가 눈에 들어왔다. 전광판에 게시된 환율을 보니 시내 환전소라서 확실히 공항보다 괜찮은 가격의 환율이었다. 그곳으로 들어가니 철장과 유리창을 너머로 핸드폰 게임에 집중하고 있는 한 아주머니가 있었다. 유리창을 똑똑 두드리고 나서 그녀에게 100달러짜리 한 장을 펼쳐 보였다.
-“익스큐즈미? 딸라 익스체인지 루블 플리즈”
그녀는 영어에 서툴렀는지 나의 영어에 러시아어로 무어라 답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 아무래도 그녀가 제대로 이해를 하지 못한 거 같아서 이번에는 양쪽 검지 손가락을 낚시하는 것처럼 휘휘 돌리며 '교환'을 의미하는 바디랭귀지를 섞어주었다. 그랬더니 그제야 그녀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보이며 이해했다는 제스쳐를 보였다. 역시 바디랭귀지는 만국 공통 언어이자 인류 역사상 최고의 언어임이 틀림없다. 어떠한 배경지식이 없이도 모든 인류가 공감할 수 있는 행위이자 서로의 다름을 이어주는 교두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언어권에 덩그러니 떨어지는 날이면 그 위대함을 부족함 없이 체험할 수 있다.
나의 우수한 바디랭귀지 실력에 도취해 있을 즈음 그녀는 루블과 영수증을 건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받아 든 루블과 영수증을 보니 예상했던 금액보다 거의 2만 원이 부족하다.
- “헤이 헤이 헤이! 왓 헤픈?? 잇츠 리얼리 스몰, 와이?”
그러자 그녀는 두부 모를 자르듯 한 마디를 내뱉었다.
- “잇츠 커미션(수수료)”
이미 큰돈을 잃고 조금의 돈이라도 아쉬운 상황에서 2만 원이라는 커다란 구멍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였다.
- “왓??? 노노노, 기브 미 마이 딸라 어게인. 아이 돈 원투 체인지. 기브 마이 딸라 롸잇 나우”
다시 돌려달라는 나의 거센 항의에 그녀는 도리어 좁은 미간을 한껏 주름지어 보이며 격양된 목소리로 내게 화를 냈다. 물론 환전수수료에 대해 미리 물어보지 않은 내 잘못도 있으니 그냥 개똥이나 밟았다 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안하무인의 태도로 일관하는 그녀의 태도에 무척이나 화가 났다. 그러나 나는 이미 이르쿠츠크에서 11시간 동안의 긴 명상과 긴축재정에 돌입한 탓에 심신이 모두 지친 상태였다. 그리고 저녁 20시 반이 넘은 시간임에도 숙소 체크인을 하지 못한 상태였고 앞뒤로 짊어진 무거운 배낭은 안 그래도 바닥난 체력에 피로감을 더했다.
시원하게 가운데 중지손가락을 치켜 올리며 법규를 날리고 싶었다. 하지만 가운데 손가락을 솟구쳐 보이는 것 또한 모든 인류가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속된 행위일 것을 알기에 충분히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대신에 적당히 나의 분을 풀 수 있는 드센 발음이 섞인 아름다운 우리말을 짧게 내뱉은 뒤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 소심한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분풀이였지만, 정신 승리 뒤에 느껴지는 나름의 위안과 스릴은 한결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한 바탕의 소동 뒤에 드디어 숙소에 도착했다. 체크인을 하기 위해 직원에게 나의 예약 내역을 보여줬는데 그 직원은 숙박비로 15,000원을 불렀다. 어플로 예약했을 때 7,000원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거의 2배의 값이었다. 왜 가격이 다른지 이유를 묻자 그는 말했다.
- “부킹닷컴이 너에게 사실 이 가격을 알려줬어야 했는데 네가 전달받지 못한 거 같아. 어플에 나온 금액이 7,000원이라도 15,000원을 내야 해.”
허허 뭐지 이 주옥같은 말은. 정말 어처구니가 실종돼서 없을 지경이었다. 어떻게 이미 예약된 금액을 자기 마음대로 올린다는 것인지. 그리고 확인해보니 부킹닷컴에서 보낸 가격 인상에 대한 메일 같은 것은 없었다. 늦은 시간에 내가 다른 숙소로 옮길 수 없는 것을 알고 조금이라도 돈을 더 벌겠다는 아주 아주 얄팍한 계략이었다.
‘너 이 새*, 잘 걸렸다 아주. 아까 다 전하지 못한 말을 너에게 선사해야겠구나.’
그러나 이번에도 나의 지친 몸은 분노하는 마음의 보폭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리고 이렇게 늦은 시간에 무거운 짐을 든채로 다른 숙소를 찾아 나서는 것도 도무지 무리였다. 결국 그가 말한 금액을 지불하고 수건과 침대 시트를 받아 방을 안내받았다.
그러나 어플에서 봤던 숙소의 모습은 굉장히 깔끔했지만 실제로 와보니 전혀 딴판으로 굉장히 지저분했다. 10평 남짓의 공간에 21 명의 사람들이 한 방에서 묶고 있어 숙소는 퀴퀴한 냄새로 가득했고 비좁은 통로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잡동사니들로 빼곡했다. 침대는 2층 침대도 아닌 3층짜리 침대였기에 앉아서 허리를 펼 수 없는 것은 물론, 사람 한 명이 겨우 누울 수 있을 정도로 침대의 크기 또한 작았다. 그리고 맨아래 위치한 내 침대는 2층과 3층에 누워있는 사람들의 사소한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삐걱거렸다.
침대에 누워 긴장이 좀 풀렸을까, 슬슬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빈수레가 요란한 것처럼 빈 속이 참 요란하게 꼬르륵거렸다. 긴축재정으로 허리띠를 너무 졸라맸나, 질식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시간도 늦고 밖에 나갈 기운도 없으니 빨리 잠들고 다음 날이 밝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한 번에 하나씩 찾아오면 좋겠고, 안 찾아오면 더 좋겠는데 도대체 힘든 일을 왜 이렇게 한 번에 찾아오는 것일까. 아무리 쉬운 적 없는 인생이었지만, 이곳에서의 인생 난이도는 2011년도 불수능처럼 급격히 상승했다.
잠시 뒤 잠을 자기 위해 양말을 벗으니 양쪽 모두 구멍이 나있는 것이 보였다. 이 녀석들도 힘들었는지 이렇게 불만을 표현하는구나. 그리고 헤지고 구멍 난 양말에서는 노폐물을 잔뜩 담은 구수한 냄새가 났다. 식초처럼 막 시큼하지는 않지만 뭔가 표현하기 참 애매모호한 냄새였다.
그러다 입꼬리 한쪽이 씨익 올라가며 미소가 나왔다. 갑자기 냄새에 중독되어 정신이 혼미해진 것이 아니다. 이 궁상맞은 향기에 미소 지을 수 있었던 것은 이 '발향기'는 곧 내가 열심히 살아 낸 흔적이자 그동안 배출하지 못한 용기이며, 오랜 상상의 결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묵묵히 담아내고 힘껏 발산하는 이 사람 냄새가 꽃보다 향기롭다고 느껴졌다. 물론 내가 느끼는 향기가 누군가에게는 고린내가 될 수도 있는 법이다. 그 구수한 내음이 좁은 방 안에 널리 퍼지기 전에 화장실로 가서 비누를 잔뜩 묻혀 싹싹 열심히 빨았다. 그러니 마치 물감통에 붓을 헹구듯 때구정물이 나오더니 금세 오이비누 향기를 물씬 풍겼다. 그리고 구멍 난 양말을 창가에 널어 두고 시간을 확인해보니 어느새 오늘과 내일의 경계선 즈음에서 째깍째깍 흐르고 있었다. 그러자 묵직한 눈꺼풀은 슬슬 영업시간이 끝나고 있음을 넌지시 암시하기 시작했다. 침대에 눕자 집요하게 힘들었던 하루의 고단함들이 머릿속에서 일렬종대로 헤쳐 모이기 시작했다.
문득 생각해보면 언제나 힘든 일은 예고 없이 찾아왔고 때로는 한 번에 몽땅 찾아오기도 했다. 그리고 힘든 시간이 많은 만큼 기쁜 시간도 많았으면 좋겠지만 인생은 행복과 불행이 꼭 정비례하지 않았다. 오히려 행복을 느끼는 시간보다는 슬픔과 걱정하는 시간이 많았고, 오늘처럼 시작부터 끝까지 아등바등 힘들기만 한 날들이 훨씬 많았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처럼 아무리 기쁜 시간이든 슬픈 시간이든 결국 시간이라는 흐름 앞에서 지나간다는 것은 모두 같았다. 그러니 내가 해야 할 것은 기쁘면 기쁜 대로 힘들면 힘든 대로 주어진 하루와 지나가는 시간에 충실하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완벽하지 않은 하루를 충실히 살아낸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잘했어, 고생했어, 수고했어.
수고했어 오늘도
아무도 너의
슬픔에 관심 없대도
난 늘 응원해
수고했어 오늘도
- 수고했어 오늘도 by 옥상달빛
낭만 없는 여행 에세이 담고 있습니다.
글/ 사진_ Instagram@jongminzz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