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계획이 나의 계획

역마살 이야기 18 Uzbekistan, Tashkent

by 역맛살

걱정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


– 티베트 속담


오지 않았으면 했던 여행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아직 저녁비행기를 타기까지 한참의 시간이 남았지만 금전적인 여유가 없었던 나는 간단한 요기를 마치고 느지막히 숙소를 나섰다. 그리고 타이트한 예산과 달리 널널하게 남은 시간덕분에 천천히 공항까지 걸어가기를 택했다. 사실 택시비조차 남기지 않고 모두 써버리는 바람에 걸어갈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다행히 공항까지는 걸음으로 1시간 20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비록 가까운 거리는 아니지만 벤츠보다 값진 두 다리가 있으니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욕심이 출렁거리는 배낭은 언제나 무겁고, 이제 봄기운이 아니라 완연한 봄이 찾아왔으니 날씨는 더웠다. 배낭 무게에 일그러지는 어깨와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니 어느새 몸은 땀으로 적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쭈글이가 된 모습으로 하염없이 걷다가 우연히 길에서 말끔한 옷과 전통의상을 입은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방앗간을 본 참새처럼 그것들을 그냥 지나쳐 갈 수 없지만 한껏 차려입은 그들에 비해 허물없이 망신창이의 모습인 내 모습에 잠시 걸음을 주저했다. 그렇게 쭈뼛거리며 주변부만 맴돌다 근처 잔디밭에서 돗자리를 깔고 수다를 떨고 있는 네 명의 소녀가 보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가가 무엇인지 물어보니 역시 나우르즈 행사였다. 잠시 그들과 앉아 멀리서 행사를 구경하던 중, 소녀들은 우즈베키스탄 음식 먹어보지 않겠냐며 나를 행사장의 부스로 데려갔다. 빵빵하게 튀어나온 뒷 배낭, 앞 가방에 걸쳐놓은 야상, 회색 티에 적셔진 땀의 흔적들, 금방이라도 목욕을 마치고 나온 사람처럼 뜬금없는 민트색 욕실화, 야리꾸리한 냄새까지.

결과는 뻔했다. 모든 이들이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시선이 익숙지 않은 나는 소녀들의 뒤를 딱 붙어 아이처럼 따라다니며 주는 음식을 덥석 덥석 받아먹었다. 하지만 곧 내가 느낀 시선과는 다르게 이곳 사람들은 한국에서 온 낯선 이방인을 격하게 환영해주기 시작했다.

나의 허기진 눈빛이라도 보았는지 그들은 내게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여러 종류의 것들을 주기 시작했고, 그들이 건네는 음식과 기념품들로 나의 배낭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팽팽한 실밥을 드러내 보였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마지막 날, 길을 걷고 걸었을 뿐인데 느닷없이 한아름의 추억을 마음 한편에 꽂았다. 이것이 걸으면서 만나는 여행의 행복일 것이다. 마지막 가는 길, 행복을 덧칠해준 그들의 격한 사랑과 관심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우연에 의한 인연을 만나기 위해

삶에 여백을 남겨둘 수 있는 것.


이것이 무계획이 계획이 되는

여행이라는 마법이 아닐까.


그렇게 배부름 가득하고 여운 깊은 만남을 뒤로하고 마침내 공항에 도착했다. 한 달간의 시간이 꿈결처럼 지나가버렸다. 왜 행복한 시간은 너무 빠르게 지나가는 것일까. 아직 마주하지 않은 현실과 고민들이 벌써부터 가슴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잠시 동안 꿈의 한 부분을 살았지만 이제 꿈에서 깨고 나면, 잠시 미뤄둔 현실의 문제들은 밀린 방학 숙제처럼 감당할 수 없게 밀려들어 올 것이다.

그리고 거무스름한 돌김 한 장을 붙여놓은 것 같았던 새벽비행기의 창에는 눈을 떠보니 어느새 빛이 드리우고 있었다. 꾸벅꾸벅 불편한 잠을 청하는 사이 타슈켄트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고향에 성큼 가까워진 것이다.

짧았던 꿈의 시간이 흩어지고, 나는 이 혼곤한 꿈 속에서 끝나지 않을 여행을 거닐며 살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꿈에서 깨어 마주해야 하는 현실 또한 내 삶의 일부였기에 나는 결국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렇게 모든 여행은 끝이 났다.





IMG_7824.JPG 나의 호위무사가 되어주었던 소녀들
IMG_7877.JPG 시선강탈 욕실화
IMG_7833.JPG 사랑해요 나우르즈.


IMG_E7867.JPG




귀국 비행기에서는 늘 창가에 앉는다.

이곳은 단색으로 채색된 구름을 바라보며 추억을 회상하고

문득 숨겨놓은 그리움을 꺼내어 남 모르게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자리였다.


눈물로 흐려진 시야 사이로 그동안의 잔상이 불현 듯 스쳐지나간다.

그리고 먹빛 어둠이 내려앉은 창 밖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과연 나는 다시 떠날 수 있을까.


아니, 이제는 돌아가서 나의 본분과 역할을 다해야 한다.

그래서 확신할 수 없다.


그렇게 훗날 자리를 잡게 되고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다 보면

그때 참 좋았다며 한 시절의 추억으로 가끔씩 떠올릴 것이다.


그래서 지나간 이들의 만남과

추억이 되어 버린 여행과

마지막일 것만 같이 이 시간들이

벌써 그립다.


아름답고도 슬픈 밤이로구나




















낭만 없는 여행 에세이 담고 있습니다.


글/ 사진_ Instagram@jongminzz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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