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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코뿔소 Feb 13. 2019

외계인을 만나기에 좋은 때는 없다

    

외계인을 만나기에 좋은 때는 없다. 바라지도 않던 오페라 따위를 강제로 보게 되어서 금요일 밤 저녁도 먹지 못하고 두 시간이나 먼저 집을 출발했는데도 늦어 버려 헐레벌떡 뛰어가고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좋은 때를 생각해보면 올림픽 개막식이나 미국 대통령 취임식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고 모든 방송국 카메라가 우글대며 모여 있을 때. 그럴 때에 우주선이니 뭐니를 타고 빛줄기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면 아무도 눈앞의 존재를 부정하지도, 목격자를 거짓말쟁이로 몰지도 않을 테니까.     


아, 다시 생각해 보니 그거야말로 가장 안 좋은 때일 것 같다. 그 정도로 요란법석을 떨며 나타났다는 건 선전포고가 아니면 침략일 테니.     


어쨌든 지난 금요일 저녁 8시 5분에 예술의 전당 주차장을 절망에 빠져 가로지르고 있을 때 눈앞에 외계인이 나타났다. 놈은 빨간 코트와 초록색 방울이 달린 노란 모자와, 대체 어디서 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파란색 워커와 보라색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마치 나 여기 있다고 소리치는 듯이. 태연히 내 앞에 선 놈은 담뱃불을 요구했다.     

내 명예를 위해 말해 두자면 나는 지극한 현실주의자고, 같잖은 음모론이나 외계인 목격담 따위에는 이성과 합리적인 사고로 무장한 채 마음껏 비웃는 사람이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그 존재가 외계인이라고 확신했느냐면, 음, 그렇게 생겼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다. 말해 놓고 보니 다시 한심해지는군. 회색 피부, 145 센티미터 정도 되어 보이는 키, 지나치게 길고 지나치게 짧은 다리, 기다란 손가락, 뒤집어 놓은 물방울처럼 생긴 지나치게 큰 머리통과 머리통의 반을 차지하는 크고 시꺼먼 눈. 내가 그것을 외계인이라고 확신한 결정적 이유는 목소리 때문이었다. 핑크 플로이드 노래의 신디사이저 같은 목소리였으니까.     


“불 있냐고, 임마.”     


내가 얼이 빠져 잠시 그놈을 관찰하고 있으려니까 외계인이 짜증스럽다는 듯이 다그쳐 물었다.      


나는 당연히, 과학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성인이라면 응당 해야 할 일을 행동으로 옮겼다. 무시한 채 걸어간 것이다. 왜냐하면, 먼저 도착한 친구가 전해준 정보에 따르면 이 오페라는 25분까지 입장이 가능하고, 입장하지 못하면 35,000원이나 하는 정신병자처럼 비싼 돈을 주고 산 티켓을 받지 못한다는 것인데, 티켓을 받지 못한다면 2018년에 황당하게도 실물 티켓을 붙인 감상문 출력본을 제출하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외계인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반쯤은 공포에 질려(외계인 때문이 아니다), 반쯤은 분노에 차서 나는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외계인이 코트(그 새빨간 코트) 주머니에서 옛날 B급 영화의 소품이랑 똑같이 생긴 광선총을 꺼내서 내 발에 대고 쏘았다. 삐유우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녹색 광선이 닿자 어처구니없게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왜 그러세요.” 하고 내가 따져 물었다.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어 살짝 부끄러웠다.     


“이 놈 보게, 불 달라니까 사람 말이 말 같지 않아? 귀머거리야?”

“사람 아니잖아요.”

“장님은 아니군.”     


겁에 질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고개를 우로 조금만 틀어도 저 멀리 꽉 막힌 도로와 걸어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외계인이 낄낄대며 말했다.     


“아무도 안 와. 애초에 일부러 이런 곳만 고르는데. 표정들이 얼마나 웃기다고.”

“저기, 제가 좀 바쁘거든요.”

“알았어, 알았으니까 일단 불이나 좀 줘.”     


고도로 발달한 외계 종족이, 인류가 돌이나 깨고 있을 때부터 발견했던 불도 만들어낼 수 없다니 황당했지만 당장은 곤경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기 때문에 나는 군소리 없이 불을 붙여 주었다. 깊게 한 모금 빨더니 놈은 귀(아마도)와 코에서 연기를 엄청나게 뿜어댔다.      


“하, 지구에서 건질 건 이거밖에 없어.”

“이제 가도 되죠?”

“너, SNS 하냐?”

“아뇨.”

“왜 안 해.”

“그냥요, 남들 자랑질을 뭣하러 봐요.”

“입은 무거워?”

“그렇다고들 하던데요.”

“SNS도 안 하고 입도 무겁다.”

“가도 되나요?”

“아주 건방진 놈이네.”     


외계인이 짐짓 화난 듯이 말했다.     


“가도 되나요?”

“뭐가 그렇게 급해, 앞으로 할 일이 많은데.”     


머릿속에서 온갖 공포가 휘몰아쳤다. 납치? 생체실험? 우주 미아? 기억 조작?      

다시 말하지만 나는 회의론자에 현실주의자다 – 다만 그 때는 어쩔 수가 없었다.     


“제발요, 아무한테도 말 안 할 테니 그냥 좀 보내 주세요. 저 지금 바쁘단 말이에요.”

“아무한테도 말 안 한 대서 안 보내줘.”     


외계인이 여전히 화난 척 내 주위를 빙빙 돌며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리고 납치 같은 거 안 해. 연료값이 더 들거든. 차라리 그런 기억을 덧씌우는게 훨씬 싸게 먹힌단 말야. 뭐, 예전에는 자주 했지. 자주 했는데, 요새는 – 뭐랄까, 전략이 좀 바뀌어서.”

“무슨 전략이요?”

“대단할 건 없고. 그냥 요새 회의가 좀 들어서.”     


외계인은 잠시 동안 담배만 피워 물고 있었다. 나는 똥줄이 타들어갔다. 벌써 10분은 지났을 거야. 시계를 보니 8시 17분이었다. 젠장할.     


“지금은 잠깐 쉬는 시간이니까 대충 봐 줄게. 야, 내가 뭘 해야 아무도 니 말을 안 믿어 줄까?”

“예?”

“내가 뭘 해야지 아무도 널 안 믿어 줄까?”

“뭘 해요?”

“이거 답답한 놈이네.”     


외계인이 한숨을 푹 쉬었다. 나는 더더욱 절망스러워져서 아무 말이나 내뱉기로 했다.     


“글쎄요, 납치는 안 하신다 했고, 최면? 아니면 광선총? 강도?”

“최면은 안 돼.” 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니가 이해가 잘 안 되나 본데, 최면을 걸면 아무 소용이 없잖아. 나중에 심리상담인지 뭔지 받아서 그때 기억을 되살린다고 해도 우리는 한참 지나고 나면 따른 놈 관찰하느라 바쁘단 말이야. 일이 밀렸는데 갑자기 난리 치면 얼마나 귀찮은데.”    

 

내가 왜 혼나야 하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외계인은 주절주절 설명을 늘어놓았다.     


“봐, 예전에는 납치니 생체실험이니 이런 게 먹혔단 말야. 근데 아까 말한 돈 문제도 있고 시간 문제도 있고 해서, 요샌 방향을 좀 바꿔 보려고. 2018년이잖아!”      


2018년을 외치는 외계인은 어딘가 우울해 보였다.     


“요새는 우리가 누굴 납치했다, 실험을 했다, 소 피를 다 빨아냈다 이런 얘기도 너무 흔해졌단 말이지. 예전엔 재밌었어. 몇 놈 미치기도 했고. 진지하게 FBI니 CIA니 전화해서 제보하지를 않나, 정부 요원들이 나와서 조사를 하질 않나, 제일 웃긴 건 하나하나 따지고 드는 놈들이었어. 과학적으로, 합리적으로.”     


“좋았던 시절이었지.” 우수에 찬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제일 웃겼던 건 미국 어디 유명한 기자였는데, 끌고 올라가서 실험대에 묶어 놓고 저녁으로 뭘 먹을까 얘기하고 있었는데 지가 줄을 끊고 탈출하는 거야. 그래서 한 번 더 잡아온 다음에일부러 풀어 주고는 주머니에다 우리가 쓰는 콘돔 하나를 넣어 줬어. 그냥 재미로.”

“그래서요?”

“들어 봐, 그러고는 웬걸, 아무 말도 안 하고 평소처럼 일하는 거야. 시발 10년 동안이나. 그러다가 마침내 스스로와의 싸움을 끝냈는지 어쨌는지 신문에다 대문짝만하게 기사를 싣고는 납치 썰을 푸는데, 당연히 아무도 안 믿어 주잖아. 자기 딴에는 지가 유명한 기자고, 기자란 족속이 그렇잖아, 또 그 양반은 그쪽으로 또 유명했단 말이야, 외계인은 없다! 뭐 이런 거, 평소에 그 동네에서 존경받는 위인이라 이거였겠지, 그런데 가족도 미친놈 취급하고, 하루아침에 광인 취급을 받으니까 증거랍시고 들이민 게 우리가 주머니에 넣어 준 콘돔이었단 말야. 근데 그거 알아? 그거 그 동네 휴게소에서 샀어. 하하!”     

“이제 가도 돼요?”     

“그러더니 결국은 미쳐 버렸어. 대가리에 콘돔을 뒤집어쓰고 발가벗고 내달리더라니깐. 웃겨 죽는 줄 알았는데.”     


외계인은 한참을 낄낄거렸다. 눈에는 탁한 은빛의 눈물까지 걸렸다.     


“또 한 번은 배가 고파서 어떤 집 부엌에 들어갔는데.......됐다. 어쨌든 좋은 시절이었어. 스마트폰도 없고. 뭐 있어도 상관은 없지. 스마트폰만 나온 게 아니라 CG도 나왔으니까. 오히려 나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얘기가 딴 데로 샜네. 어디까지 했더라?”

“새로운 전략이요?”

“맞아, 참. 하여튼, 발가벗은 외계인 세 명이 우주선에서 내려와서 너를 납치해서 피를 뽑고 이상한 기계에 묶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빨간 코트에 파란 워커를 신고 보라색 스웨터를 입은 외계인이 서울 한복판에서 너한테 담뱃불을 빌리고 교회 다니라고 전단지를 주었다. 어느 쪽이 더 개소리 같아?”

“두 번째요?”

“그래, 당연하지. 아무도 널 안 믿어 주겠지?”

“네, 저도 안 믿기는데요. 이제 가도 돼요?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한다니까요.”

“안 돼. 너 혼자 끙끙 앓다가 미치는 걸 보는 것도 재밌긴 한데, 여러 명한테 – 가능하면 언론에도 – 사방팔방 떠들고 다니다가 미친놈 취급받는 거 보는 게 더 재밌어.”

“그럼 친구한테는 얘기할게요.”

“친구가 몇 명인데?”

“많진 않죠.”

“그럼 글렀군.”     


나는 초조하게 기다렸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몸이 오들오들 떨리는 게 밤공기가 차서인지 공포 때문인지는 몰랐지만.     


“사실 애초에 너무 약해. 지금은 잠깐 쉬는 시간이라 이런 얘기 해 주는데, 너무 약하단 말야. 실험이나 납치에 비해선. 야, 명색이 외계인인데 어느 정도는 외계인스러운 짓을 해야지 기억에도 남고 충격도 있을 거 아냐. 가끔 너무 충격이 심하면 기억을 아예 잃어버릴 때도 있고, 뭐 그건 감수해야 할 일이긴 한데. 어쨌든 문제는 네놈들이야.”

“우리요?”

“그래. 영화니 뭐니 너무 많이 봐서 이제 UFO나 이런 건 식상해졌나보지. 올라타자마자 셀카부터 찍어대니 원. 그거 한 번 띄우는 것도 얼마나 비싼데. 또 이 더러운 새끼들 몸에 병균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우리한테도 리스크가 크다구. 오염 정화장치도 지 혼자 돌아가는 게 아니니까.” 

“그래서요?”

“그래서 좀 더 효율적이고 참신한 방법을 연구중이란 거지. 목적은 하나야. 재미. 근데 그 재미는 어디서 나오느냐. 믿음을 꺾고 어처구니없는 장면을 보여 줘서 스스로를 부정하고 남들에게 부정당하다 미쳐 버리는 꼴이란 말야. SNS가 생기고 나서 한동안은 재미 좀 봤는데, 왜냐하면 옛날 신문이나 잡지하고는 애초에 스케일이 다르니까. 근데 그건 좋은데, 부작용이 있더란 말이에요, 겁을 안 먹어. 거기다가 봐라, 매일 똑같은 짓만 했다간 1분도 안 돼서 조목조목 반박을 당해, 우린 열심히 하고 있는데 ‘저건 공군 전투기 불빛이고 그건 술에 취해서 본 집단 환각이고 이건 빠르게 날아가는 날파리가 잘못 찍힌 거고’ 이 지랄들을 해 대면 기분이 나쁘겠어, 안 나쁘겠어? 해서 좀 더 소박하고 효과적으로 이것저것 해 보고는 있는데 잘 안 먹히네.”     


‘나쁘건 말건 나하고 무슨 상관이람.’ 하고 나는 생각했다.     


“이 새끼, 생각하는 것 좀 봐.” 하고 외계인이 내 정강이를 걷어찼다. 아팠다.     

“그래서 사람들이 믿어 줬으면 하는 거예요, 믿지 않았음 하는 거예요?”     


외계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음, 글쎄. 3~5 정도는 믿고, 1은 열심히 반박하고, 30은 관심 없고, 나머지는 대충 믿는 정도면 적당하지. 우리가 좀 대담해질 때면 한 10에서 15정도까지 믿었으면 좋겠는데 그건 우리가 아직 여력이 안 돼서.”

“궁극적인 목표는요?”

“응? 궁극적 목표?”

“그래요, 언젠가 전 지구인들을 노예로 만든다거나, 침략한다거나, 세뇌시킨다거나.”

“아냐, 아냐. 그런 짓은 안 해. 그냥 조금씩 재미 보는 거지. 그런 짓은 신이나 하는 거잖아. 그쯤 되면 아주 갈 데까지 간 거고. 굳이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악마 같은 거지. 분열을 일으키고, 믿음을 시험하고, 진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신이 진짜 있어요?”

“그럼, 당연하지. 너 예수 알아? 예수는 사실 우리가 프리메이슨하고 합작해서 만든 클론이야. 미국 대통령 유전자랑 우리 유전자를 반씩 섞어서 과거로 보낸 흡혈 파충류라고.”

“진짜요?”

“구라지, 병신아.”     


이런, 젠장.     


“어쨌든 니들이 우릴 믿거나 말거나 상관없어. 마약에 쩔어 나타난 환상이라 치부해도 상관은 없어. 가끔 기분이 좀 상할 때가 있긴 한데....... 뭐 재미만 있으면 됐지, 안 그래?”

“그러시겠죠.”     


시계를 보니 8시 32분이었다. 염병할, 이제 뭐 아무렴 어때. 그냥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자네는 왜 오페라를 관람하지 않았나? 

가다가 외계인을 만나서요.      


교수가 이딴 헛소리를 믿어줄 리도 만무했고. 그래서 나도 담배를 피워 물었다. 이 모든 게 이제 꿈처럼 느껴져서.     


“그냥 그거 해 봐요, 예수 믿냐고.”

“그것도 잘 안 먹히더라구. 눈앞에 외계인이 나타나도 예수는 싫다 이건가.”

“그쪽도 힘들겠네요.”

“옛날 같진 않아. 80년대가 좋았어. 음악도 훨씬 나았고.”

“확실히 나았죠.”     


한동안 담배를 피우다가(나는 매번 열심히 불을 붙여 주었다) 마침내 외계인은 손을 툭툭 털고 말했다.     

 

“그냥, 옛날처럼 협박이나 좀 해야겠다. 총 들이대고 뭐라도 좀 뺏어 가면 현실성이 좀 있겠지. 스마트폰 같은 거. 좋네. 내가 외계인을 봤어! 스마트폰을 뺏겨서 증거가 없어. 이런, 거짓말쟁이! 그러고는 한 한 달 쯤 뒤에 우리 셀카 좀 찍어서 그 집 우체통에 넣어 두는 거야.”

“그나마 제일 낫네요.”

“그렇지?”

“응.”     


찌이이웅, 하는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하늘에서 작은 비행물체가 나타났다. 반구형 유리 천장에, 원반 접시 모양을 한 은빛의 물체였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공기 중에서 흰 빛을 뿜으며 떠다니고 있었다. 지금 다시 이야기하려니 정말, 현실성이라곤 하나도 없군.     


“그럼 잘 있어라. 얘기하고 나니 기분이 좀 낫네.”      


1인승 미확인 비행물체가 뿜어내는 흰 빛 아래 서서 외계인이 말했다.      


“예, 잘 가세요. 참, 가시기 전에 제 기억만 좀 지워 주고 가시면 안 되나요?”     


외계인이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찼다.      


“너 지금까지 무슨 얘길 들은 거야.”

“안 되면 말고요.”

“그래, 잘 있어라. 친구들한테 내 얘기 많이 하고.”     


그러더니 외계인은 뿅 하는 소리와 함께 우주선에 탑승해 밤하늘로 날아갔다. 그걸 아무도 못 봤을 리가 없는데, 아무튼. 어쨌든 나는 이 끔찍한 만남을 결코 잊지 못하리라. 거지같은 놈, 결백한 민간인간에게 지 할 말만 하고 지 속만 편해지고 돌아가다니. 오페라 관람도 글렀겠다, 과제도 날아갔겠다, 나는 슬프고 억울한 마음으로 우선 밥부터 먹기로 했다. 몇 시야, 보니 7시 47분이었다. 그래서 일찌감치 표를 받고, 여전히 밥 먹을 시간은 안 되었지만, 160분동안 푹 잤다. 오페라는 아무 재미도 없었다. 바그너가 나처럼 가난하고 배고픈 대학생에게 뭘 해 줬단 말인가. 끽해야 히틀러한테나 감동을 줘서 전쟁이나 벌이게 만들었지.      


집에 와 보니 주머니에 담배가 한 갑 있었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불 빌려줘서 고맙다’는 글귀와 함께. 질감이 이상하리만큼 없는 얇디얇은 은빛 정사각형의 곽에 굉장히 수상쩍은 보라색의 이파리가 가득 채워진 담배 스무 개피가 들어 있었다. 이거 대마초 아냐,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그래도 선물이니까 한 대 피워 보았다. 더럽게 맛없더군. 적어도 오늘 들었던 말 중 하나는 맞았다. 건질 건 이것뿐이라더니.      


뭐, 이게 이야기의 전부다. 지난 금요일에 괴상한 차림의 외계인을 만나 나는 불을 빌려주고, 혼나고, 얘기를 들어준 대가로 외계인은 시간을 되돌려주었고 맛없는 담배 한 갑을 주었다. 그러고는 UFO를 타고 사라졌다. 10년쯤 뒤에 나도 마침내 돌아버려 주변에 내가 외계인을 만났다고 외치고 다닐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담배는 대가리에 뒤집어쓸 수 없으니까 다행이라 생각한다.     

 

여러분은 내 얘기가 믿어지는가?     

당연히 아니겠지.     

어쨌든 외계인을 만나기에 좋은 때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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