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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코뿔소 May 26. 2020

스케치 - 저세상

눈을 떠 보니 기다란 복도에 앉아 있었다. 엉덩이에 닿는 벤치의 감촉은 이상하리만큼 푹신했다. 분명 나무로 되어 있는데도 말이다. 그렇다고 푹푹 꺼지지도 않았다. 손에는 58이라 쓰인 번호표가 쥐어져 있었고 나는 본능적으로 왼쪽을 바라보았다. 열, 열하나, 열둘... 대충 열일곱 명 정도가 앉아 있었다. 지루한 얼굴로. 나는 기다리는 것에 대단히 익숙한 사람이지만 뚜렷한 목적 없이 기다리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누군들 그렇지 않은가? 다시 보니 이곳은 전입신고를 하러 갔던 영등포구 주민센터와 굉장히 닮아 있었다. 분위기가 그랬다는 말이다. 50개년 계획표(5년이 아니라 50년), 인정 및 적응 상담은 ----번(내가 아는 기호가 아니어서 읽을 수가 없었다), 신고 및 재배치 관련 문의는 우측 복도의 --번 사무실로 접수해 주십시오, 구제절차 지원금 신청 절차 따위의 문장이 적힌 포스터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이 너덜거리며 눈앞의 벽에 붙어 있었다. 


내 왼쪽에 앉은 것은 내가 굉장히 싫어하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목까지 문신이 빼곡하고 눈썹은 빡빡 민 데다 귀에는 커다란 고리가 달려 있는데 모가지는 구부정하고 통이 지나치게 넓은 바지를 입은 젊은 남자였다는 뜻이다. 그런 사람들은 꼭 반지를 몇 개씩이나 끼고 다닌다. 거기다가 다리를 떤다. 별로 말을 붙이고 싶은 대상은 아니어서 나는 커피 자판기를 찾아보기로 했다. 오른쪽을 보니 복도는 끝없이 이어졌다. 은행도 그렇고 관공서도 그렇고 괜히 헛짓거리 하다가 번호표 부를 때 놓치면 짜증만 나는 법이다. 나는 얌전히 앉아 있기로 했다. 핸드폰은 사라지고 없었다. 연락 올 곳도 없지만 어쨌든 현대인이라면 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시선 회피 수단 하나쯤은 갖고 다니는 법이다. 


‘저기요.’


이런, 씨발. 


‘여기 어딘지 아세요?’ 


나는 애써 친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것이 서른 남짓 살아오면서 내가 배운 많은 것 중 하나였다. 무해하고 친절하지만 이야기를 오래 하고 싶지는 않다는 함의를 가득 담은 미소. 


‘글쎄요, 저도 잘.’ 여기서는 말을 흐려야 한다. 나는 당신과 별로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라는 뜻이 잘 전해질 수 있도록. 그러나 내가 싫어하는 부류의 젊은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붙여왔다. 제발, 제발 부탁인데 욕만 하지 마라. 그러나 그는 줄기차게 말을 걸어 왔다. 여기가 어딘지 도통 모르겠고, 자기는 - 별로 글로 옮겨 적고 싶지도 않은 - 무언가를 하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이런 곳에 있었다, 졸라 짜증난다, 씨발, 어쩌고, 저쩌고, 당신은 뭘 하고 있었냐(나는 대충 대답해 주었다), 혹시 핸드폰 있어요? 여기 누구한테 말해야 되요?(돼요가 맞지만 나는 그가 분명 되요라고 글을 썼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제일 짜증나는 점은 그가 이곳에 오기 전까지 했던 일을(전혀 궁금하지도 않은) 자랑스럽게 이야기했고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는 것이다. 나도 몰라. 그냥 얌전히 좀 기다려. 마시멜로 실험 얘기도 못 들어봤냐.


띵-동, 하고 천장에서 벨이 울렸다. 그러나 스피커는 보이지 않았다. 57번 고객님, 창구로 와 주십시오. 사무적인 목소리가 울렸고 왼쪽의 문신으로 가득한 남자는 그제서야 다리를 떠는 것을 멈추고 내 쪽을 흘낏 돌아보더니 성큼성큼 복도 끝의 문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다행이야, 시간은 금방 갔네. 굳게 닫힌 나무 문 안에서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투의 질문이(또!) 문을 뚫고 들려오더니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뭐냐구, 대체. 문신을 한 남자는 다시 나오지 않았고 곧 천장에서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58번 고객님. 창구로 와 주십시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복도는 생각보다도 길었고 손 끝에 닿는 문의 감촉은 지나치게 차갑고 또 무거웠다. 


방 안, 책상 건너편에 앉은 남자는, 음, 그야말로 공무원처럼 생겼다. 한 12년차. 6급? 아마.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했고 올챙이배가 톡 튀어나온 남자는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가능한 한 최대로 친절한 미소를 짓고 가능한 한 최대로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예, 안녕하세요.’ 공무원은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공무원이 다 그렇지, 뭐. 


‘서류 주세요.’

‘예?’


공무원은 벼르던 짜증이 터지고 말았는지 크게 한숨을 쉬더니 뒤쪽을 향해 소리쳤다.


‘야, 김주사! 그 새끼들 아직도 전산 마비래? 아니 왜 서류가 안 오냐고?’


나는 괜히 움츠러들었다. 아니다, 쫄 것 없어, 내가 내는 세금이 얼만데.


‘죄송합니다, 이거. 낮부터 아주 서버가 터져서 난리네요. 밖에 몇 명이나 있던가요?’


모른다.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네요. 저도 정신이 없어서. 근데 여기가 어딘가요?’


공무원이 두 번째 한숨을 크게 쉬었다.


‘설명 못 들으셨어요?’


‘무슨 설명이요?’


공무원은 세 번째 한숨을, 이번에는 더욱 크게 쉬었다. 나는 짜증이 났다. 표정이라도 읽었는지 공무원이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오늘 아직 밥도 못 먹어서요. 야, 김주사! 서류 멀었어?’ 


예에, 지금 뽑고 있습니다, 하는 소리가 맥없이 울려퍼졌다. 니미, 지가 밥 못 처먹은 게 내 잘못인가. 밥은 나도 못 먹었어, 이 양반아.


‘저기, 자꾸 욕 하지 마시구요. 저는 괜찮은데 나중에 판사 앞에 가서는 욕 하지 마세요. 그리고 선입견 가지는 것 별로 안 좋습니다. 57번 얘기구요, 그게 다 들어가거든요.’


뭐지. 


‘원래 설명 듣고 오셔야 되는데 지금 서버도 터지고 전산 마비에다가 인력도 후달리고 해서 절차가 좀 꼬였어요. 그래서 제가 설명을 잠깐 드릴 건데, 야, 김주사, 커피 한 잔, 아니 두 잔만 갖다 줘.’


눈앞에 커피가 나타났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아서 나는 일단 한 모금 삼켰다. 행복하세요.


종이컵에 쓰인 문구는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일단 저는 말단직이고 원래 이런 일 안 해서 좀 미흡하더라도 양해하시고, 선생님은 돌아가셨거든요. 종교가 천주교 맞으세요? 근데 냉담자셨고. 성당 잘 안 다니셨죠? 나이 서른 둘. 차에 치이셨구요. 국적 대한민국 맞으시죠? 서울 사셨고.’


나는 얼이 빠져 고개만 끄덕였다. 


‘예, 확인되셨구요. 서류 나오면 한번 확인하시고 서명하신 다음에 대기하시면 저희가 또 연락을 드릴 거예요.’

수많은 질문이 머리를 맴돌았지만 우습게도 제일 먼저 나온 질문은 이거였다.


‘저기, 근데 제 앞에 있던 분은 왜 좋아하셨던 거예요?’


격무에 치인 공무원답게 침착한 태도로 그는 ‘죽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기뻐서’라고 답했다. 역시 그런 놈들은 나사가 몇 군데 빠져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잠시 후 그 김주사라는 사람이 헐레벌떡 뛰어와 공무원과 내 앞에 두툼한 서류를 한 무더기씩 내려놓았다. 인적사항, 종교, 국적, 선행, 악행, 사인, 기타 등등 정보가 너무도 많이 기재되어 있어 도저히 한번에 훑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물었다.


‘제가 죽었다고요?’


공무원은 서류에서 눈도 떼지 않고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태평한 어조로 답했다.


‘예, 선생님 돌아가셨구요, 이거 그냥 형식적인 절차니까 한번 훑어 보시구요, 판단 제가 하는 것 아니니까 일단 사인 하시고 돌아가 계시면 조만간 연락 갈 거구요, 궁금한 점 있으시면 민원 접수하시거나 명함에 적힌 번호로 전화 한번 주세요. 상담은 처음 백 여덟 번까지는 무료고 1년까지만 유효하니까 그 점 참고하시고, 항소하실 수는 있는데 승률 별로 높지 않으니까 혹시 항소하시려면 일단 변호사부터 구하시구요, 궁금한 점 있으시면 번호 다 적혀 있으니까 거기로 문의하세요. 야, 김주사, 이 분 안내해 드려.’


씨발놈이.


그래도 입밖으로 내뱉을 정도로 담력이 있진 않았다. 그러나 공무원은 다시 한 번 크게 한숨을 쉬었다. 


‘저기요. 다시 말씀드리는데 욕 자꾸 하지 마세요. 그거 다 들어가니까요.’


알 게 뭐람.


김주사라는 젊은 작자가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내 팔을 잡았다.


‘선생님이 이해하세요. 원래는 좋으신 분인데, 요며칠 서버가 터지셔서 좀 짜증이 나셨거든요. 혹시 궁금하신 점이 있으신가요?’


나는 사물에 존칭을 쓰는 꼬라지에 짜증이 났다. 서버는 짜증이 나실 수가 없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안 하면 짜증내시는 분들이 계셔서요. 이해해 주세요. 저도 일한지 얼마 안 돼서요.’ 


내가 알 바냐, 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이 인간은 말이 좀 통할 것 같았다.


‘그래서 제가 죽었다구요? 대기는 또 무슨 소리예요? 판사는 또 누구고요? 이제 어디로 가면 돼요? 여긴 또 어딥니까? 여기 구청 아니에요?’


환한 웃음을 지으며 김주사라는 놈은 대답을 하려 했지만 곧 59번 고객을 부르는 (짜증스러운)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고, 그는 미안한 표정으로 서류 다발을 또 한번 건넸다. 목소리는 지나치게 빨라져서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더 도와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여기 서류랑 명함하고 연락처 다 있으니까 궁금한 점 있으면 전화주시고, 불편한 점은 여기 제 번호니까 연락주세요. 저쪽 문으로 나가시면 됩니다.’


문을 열고 나가자 그야말로 퇴근길의 신도림역을 방불케 하는 광경이 펼쳐졌다. 그나마 마음에 들었던 점은 공기가 맑았고 저멀리 산과 호수가 보였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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