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은 것만 보는 눈

내 눈의 프레임은 얼마나 하찮은지

by 물지우개

같은 길을 걸어도 때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다르다.

같은 장면을 봐도 사람마다 보는 것이 다르다.



어제 출근길에는 교복 입은 중학생이 전화를 받으며 뛰는 모습이 보였고, 오늘 출근길에는 횡단보도에서 노란 깃발을 든 녹색 어머니가 보였다. 아파트 산책로를 걸으면 나는 길가에 핀 꽃을 보고 아들은 길바닥에 곤충이 뛰는지 살핀다. 딸은 산책하는 강아지의 꼬리를 보고 남편은 달리는 자전거를 바퀴를 본다.

딸이 가방을 사달라고 했다. 망사주머니가 있는 가방이 갖고 싶다 했다. 망사주머니에 인형을 넣으면 밖에서도 잘 보이는 가방이란다. 퇴근길에 보니 중학생들이 우르르 교문을 나왔다. 그들이 맨 책가방을 보니 전부 망사주머니가 있었다. 주머니 안에는 약속한 듯 인형이 들어 있었다. 딸이 조르고 나서야 나는 망사주머니에 인형이 든 책가방을 볼 수 있었다.




내가 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내 눈은 전부를 보고 있어도 전부를 보지 않고, 볼 수 없다. 캄캄한 무대가 아무리 커도 우리는 조명을 받은 피사체만 보는 것처럼 말이다. 무대 위 배우는 또 어떠한가. 객석이 캄캄해서 어떤 사람이 왔는지, 얼마나 왔는지 보이지 않다가 불이 켜져야 확인할 수 있다. 내 눈은 모두를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것만 볼뿐만 아니라 보이는 것만 진실이라고 믿는다. 내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닌데도 말이다.


내 아이를 잘 안다고 생각해도 내가 아는 아이의 모습은 일부에 불과하다. 나는 아이가 학교에서 어떻게 생활하는지 알지 못한다. 공개수업 때 잠깐 보는 모습만으로는 평소 학교생활을 알 수 없다. 학원에서는 어떤 아이인지, 친구들과 놀 때는 어떤지 전혀 모른다. 아이에게 물어도 정확한 대답을 듣기 어렵다. 나는 어떤 교사인지 아이에게 설명하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리라.


누군가 “남편은 어떤 사람이에요?라고 묻는다는 나는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솔직하게 나는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무지의 정도가 내 아이보다 더하다. 직장에서는 어떤 스타일로 말을 하고 일을 처리하는지 본 적 없다. 나에게 보이는 모습과 직장에서 보이는 모습이 다르다는 사실만 확실할 뿐. 다른 모습은 추측뿐이다. 하긴, 남편은 나를 알까. 내가 어떻게 가르치는지, 우리 반 아이들에게 어떻게 말을 하는지, 업무로 부딪힐 때는 어떻게 처리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리라. 배우자나 아이에 대해 잘 안다고 구구절절 설명하는 사람은 사실 무지를 덮기 위한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아무 도끼나 발등을 찍지 않는다. 믿어야 가능한 일이다.

내가 믿은 사실 뒤에 보이지 않는 빙산이 있다는 진리, 내 시각에 편견, 선입견, 고정관념이 늘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해야 체감할 수 있을까. 뜨거운 것이 피부에 닿아야만 뜨겁다고 느낄 수 있는 걸까. 닿지 않고 보는 것으로는 열을 알아차릴 수 없을까. 그러나 좁은 시각을 피하기 위한 엉뚱한 추측은 다시 독이 된다.


우리 반 어느 아이가 모처럼 학습지에 그림을 정성껏 그려 왔다. 나는 즉각 칭찬했다.

“와~ 진짜 잘했구나. 평소보다 훨씬 더 멋진데?”

아이는 내 말에 밝지 않았다. 아이는 내 칭찬에,

“선생님이 모르셔서 그래요. 저 원래 잘 그려요.”

반대인 경우도 있었다. 평소에 체육이 제일 좋다고 말하는 아이였다. 다른 과목 수업은 큰 반응 없어도 체육만큼은 눈이 반짝거리는 아이다. 어느 체육시간 체조를 배우는데 그 아이 얼굴이 울상이었다. 대부분 아이들에게 쉬운 동작도 그 아이는 잘 따라 하지 못했다.

“체육 좋아하는 **이가 체조는 왜 이렇게 안 되지?”

“체육 좋아하면 다 체조 잘하나요? 체조는 싫어요. 못하겠어요.”


내가 판단한 내용이 극히 일부분이라는 사실 알지 못한 채 아이에게 떠드는 말은 상처가 된다. 아이에게 많은 말을 하려고 애쓰면서도 그 말이 얼마나 좁고 그릇된 지 깨닫는 순간마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든다. 나는 아이에게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교사는 아닌지. 아이가 나에게 보여준 모습도 내가 보기 싫으면 외면하는 교사는 아닌지. 좁은 시각으로 아이를 재단하고 프레임 속에 가두지는 않았는지. 그릇된 판단으로 결과를 속단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한다. 늘 백지상태에서 아이를 새롭게 보지 못하더라도, 내가 보지 못한 부분마저 염두에 둘 수 있는 여유가 있는지 생각한다. 보지 못한 진실마저 나는 궁금해하고 알기 위해 노력했는지 반성한다.




갑자기 무서워진다. 내가 사람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일부일 뿐만 아니라 그 마저도 거짓일까 봐 두렵다. 어차피 전부를 볼 수 없다면,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면 설령 그것이 거짓일지라도 좋은 면만 봐야겠지. 흔한 말로 긍정적 시각 말이다. 내 발등이 찍혀도 걱정이나 의심으로 가득 찬 눈은 불행이다. 그래, 내일도 나는 별 수 없이 편견으로 사람을 보겠지. 부디 내 시각의 프레임이 매일 조금씩 커지고 대개는 따뜻하다가 때로는 객관적이고 아주 가끔은 냉정해지길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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