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째, 오늘도 교단이 두렵습니다
지금도 생생한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수업 시간, 내 뒤에 앉은 아이가 내 등을 톡톡 두드렸다. 여느 1학년이 그러하듯 나는 즉각 뒤돌아보았다.
“내가 수수께끼 낼 테니까 맞춰봐!”
“뭔데?”
“빨간 주머니에 금돈이 가득 들어 있는 게 뭐게?”
“나 그거 알아, 고추잖아!”
“틀렸어.”
“아냐, 내가 그 수수께끼 아는데 분명히 답이 고추였다고!”
“초록색 고추도 있잖아, 빨간 고추라고 해야지, 그냥 고추라고 말했으니 넌 틀렸어.”
“아니라고! 분명 답은 고추야!”
내 목소리가 제법 컸는지 선생님은 수업을 중단했다.
“누가 수업 중에 이렇게 떠들지? 뒤돌아보는 물지우개구나! 이름을 써놔야겠네.”
선생님은 화난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시며 칠판 오른쪽 맨 위에 내 이름을 특유의 명조체로 꾹꾹 눌러쓰셨다. 그리고는 수업 마치기 전 이름 쓰인 아이들을 모두 불러 긴 회초리로 손바닥을 한 대씩 때리셨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고통과 창피함이었다. 나는 학교에서도 집에 와서도 계속 울기만 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생각하지 않았다. 오로지 나한테 말을 건 친구가 미웠고, 선생님이 야속할 뿐이었다.
코로나로 공부 시간과 쉬는 시간의 경계가 모호한 요즘이다. 쉬는 시간이 되어야 운동장에 나가 놀고 교실과 복도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 쉬는 시간을 알리는 경쾌한 종소리 덕분에 아이들은 공부 시간도 견딜 수 있는데, 요즘은 그마저도 불가능하다. 1학년이 된 지 100일이 조금 넘었고, 등교도 이제 겨우 한 달 정도 해 본 아이들에게 수업 시간의 집중은 힘들다. 내가 설명하는 동안 아이들은 친구와 이야기하고, 가끔은 일어나서 큰 소리를 내며 흥분한다. 발표하는 아이 목소리보다 수다 소리가 더 클 때도 있다.
“○○아, 지금 친구가 발표하는데 ○○이 목소리 때문에 발표가 들리지 않아요. 발표하는 친구 마음은 어떨까?”
“속상해요.”
“맞아요. 내 발표를 무시하나 오해할 수도 있어요. 발표하는 친구가 ○○이를 오해하면 안 되겠죠. 지금 선생님은 누구 목소리가 듣고 싶을까?”
“발표하는 친구요.”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선생님은 친구한테 피해 주는 사람이 싫어요. 선생님은 ○○이를 좋아하는데 ○○이가 친구한테 자꾸 피해를 주면 선생님 마음이 바뀔 수 있을 것 같아.”
“그건 안 돼요.”
“선생님이 좋아하는 ○○이의 목소리를 발표로 듣고 싶어.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손들고 발표해 주세요.”
수업의 경계를 세우는 일은 한 번에 되지 않는다. 소비자가 교육 서비스 중심에 서 있지만, 수업에서도 경계는 필요하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반드시 정의롭지 않아도 소수의 만족감이 단 한 명에게 피해라면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교실에서는 말이다. 나는 같은 말을 하루에 여러 번 반복한다. 내 노동의 핵심 과제는 지루한 반복을 새롭게, 생기 있게 수행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어제 맘 카페에서 담임선생님의 폭언이 심해 아이의 책가방에 녹음기를 넣었다는 글이 올라왔다. 녹음기를 들고 교장실로 갈지, 교육청을 갈지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녹음된 선생님의 폭언을 감싸고 싶지는 않다. 다만, 내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피해를 주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라고 말하고 싶다. 학교는 구성원 모두 서로 기대면서 성장하는 곳인데 나(교사가 될 수도 있고, 내 아이가 될 수도 있다)만의 성장을 빌미로 타인을 아프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나는 1학년 때 친구들에게 피해를 주었고, 선생님은 그런 나를 아프게 했다. 지금 어느 담임교사는 아이와 학부모를 아프게 했고, 학부모는 교사를 아프게 한다. 문제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응징의 상처만 내고 있다. 서로가 성장하는 문제 해결법, 한 사람도 상처 받지 않는 길에 관해 오늘도 위태로운 교단에서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