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自我)’는 없다

무아(無我)를 깨닫게 한 아이

by 물지우개

작년에도 한 명 있었는데 올해도 보인다. 친구와 관계를 맺는 일이 힘들고, 선생님과 편안하게 소통하지 못하는 아이. 늘 두려움에 쌓인 듯 겁먹은 표정을 짓고 종종 힐끗거리며 눈치를 본다. 기회를 주어도 발표를 하지 않고, 힘들어도 도와 달라 말하지 않는다. 불러도 대답이 없고 물어도 시원하게 답하지 않는다. ‘나를 그냥 내버려 두세요. 날 건들지 말고 제발 지나가세요.’라고 온몸으로 말하는 것처럼 보여 아이들도 나도 대화를 시도하다 그만둔다.


불교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인 무아(無我)는 글자 그대로 ‘나(自我)’가 없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흔히 ‘나답다’ 혹은 ‘나답지 못하다’라는 말을 쓰는데 이 개념에 따르면 그런 말은 아예 있을 수 없다. ‘육체 속에 연속적으로 변하지 않는 나’란 실체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먹고 싶었던 떡볶이를 먹으면서도 내일은 순대를 먹어야지 라고 생각하고, 짜장면을 먹으면서도 짬뽕을 먹었어야 하나 하는 모습조차도 나라는 뜻이다. 사람들 속에서 기분 좋게 수다를 떨었으면서 집에 와서는 왜 그랬을까 후회하고 타인의 시선이 힘들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려고 노력하는 모습도 그냥 나라는 말이다. 사람 관계 속에 맺히는 혹은 맺히지 않는 희로애락의 변하는 내 모습 그냥 나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나를 찾아서 훌쩍 떠나는 말은 맞지 않다. 어디서도 나를 찾을 수 없다. 시시각각 달리 보이는 내가 그냥 나다.



개인의 삶은 절대 신이나 부처의 소유물이 아니다. 또 ‘나’는 이 몸과 마음의 소유자가 아니라 관리자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참 나’는 무아(無我)다. 무아는 대아(大我) 요, 대아는 시아(視我)다. ‘고정된 나’는 없으며, 그렇기에 어떠한 나도 만들 수 있다.
[선가귀감 강설 / 월호 ]



문제는 관계에 있다. 나를 찾아 훌쩍 떠나도 사람을 만나야 한다. 숙박 업소나 식당 주인을 만나 말을 해야 한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마주치는 순간, 새벽 공기 속 이파리에 맺힌 이슬처럼 내가 보인다는 뜻이다. 문제는 관계 맺는 일이 힘든 경우다. 대부분의 아이는 친구와 좋든 싫든 마음을 나누는데 이 아이는 가족 이외의 타인과 관계 맺는 일이 힘들다. 지켜보는 사람도 마음이 아프다. 어떻게 도와주어야 하는지 모르겠고, 괜히 도와주었다가 문제를 더 크게 만들지 않을지 걱정이 된다.


변하지 않는 ‘나’는 없다. 변하기 때문에 무아(無我)다. 겁먹은 눈을 가진 아이가 계속 겁먹은 눈빛을 보낼까 봐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한 시간 후의 내 마음도 어떻게 변할지 가늠하지 못하는데 저 아이가 저대로 고정 불변할까 봐 안절부절못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지금 아이의 모습 그대로, 나는 나대로 관계를 맺으면 된다. 나에게 온 운명 같은 아이를 최선의 눈으로 쳐다보고 아이와 나 사이에 맺히는 이슬에 감사하면 된다. 어느 날은 말 한마디 없고, 아무 표정도 짓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마저도 우리가 만드는 소박한 ‘나’다. 나는 만들 수도 없는 좋은 ‘나’를 위해 애쓰지 않겠다.


오늘도 그 아이는 나를 두려워했다. 내가 가까이 가면 움츠러들었고 내가 다정히 말을 걸어도 고개를 숙였다. 나는 아이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지금 충분히 잘하고 있어.” 이 말은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오늘은 이렇게 너와 관계에서 ‘응원하는 나’를 만났구나. 네 마음에 내 마음이 당장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언젠가는 네 어깨를 펼 수 있는 힘이 되기를. 이십 년 후 너를 만나면 우리 서로 알아보지 못할 만큼 변해 있기를. 나는 어린아이가 되고, 너는 사자가 되어 마음껏 달리기를.


오늘 나는 내 업이 좋다.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어 좋다. 감사하다. 무아(無我)를 깨닫게 한 이 아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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