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꽃과 아이와 나

by 물지우개

아까 읽던 책을 들고 창가 의자에 앉았습니다. 들어오는 바람에서 꽃향기가 납니다. 그 바람에 책으로 향하던 눈이 감깁니다. 내 들숨을 따라오는 꽃향기가 반갑습니다. 나는 더 크고 깊게 숨을 쉽니다. 숨 쉴 수 있어 고맙습니다.


우리 교실에 화분이 많습니다. 공기를 맑게 한다는 풋풋한 아이들이 창가를 차지했습니다. 이름이 같아도 같은 잎은 하나도 없습니다. 쏟아질 듯 아래로 떨어지는 잎도 있고 절대 곁을 내주지 않겠다는 듯 꼿꼿한 잎도 있습니다. 같고 다름은 늘 함께 있습니다. 잎처럼, 꽃처럼, 아이들처럼.


어릴 때 무서운 것이 많았습니다. 저들끼리 웃고 떠드는 친구도 무섭고, 수업시간 발표도 무섭고, 선생님 얼굴도 무서웠습니다. 소리 지르는 아빠도 무섭고, 엄마를 기다리는 일도 무서웠습니다. 나를 앞질러 가는 오빠의 뒷모습도 무서웠습니다. 땅을 보고 걸으며, 어른이 되면 바닥과 멀어지고, 무서움도 괜찮아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분명 나는 어른인데 아직 바닥입니다. 무서움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고, 내 심장 소리가 들릴까 걱정합니다. 가짜 어른인가 봅니다.


우리 반에 나와 꼭 닮은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는 나한테 잘 보이려 애를 씁니다. 내가 지나가면 흐트러진 자세가 반듯해지고, 내가 다가가면 비뚤던 글씨가 세워집니다. 그 아이는 내 주변을 왔다 갔다 자주 나를 살핍니다. 내가 펜을 떨어뜨리면 냉큼 줍고, 내가 저에게 말을 걸면 기다렸다는 듯 쏟아냅니다. 그러다 내가 고개를 돌리면 실망한 얼굴로 자리에 앉습니다. 나는 그 아이가 정말 싫습니다. 그 아이가 나와 같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다면 나는 아주 많이 사랑해줄 것입니다. 기특하다 잘했다 수고했다 말해주겠습니다. 그 아이가 원하는 대로 표현할 것입니다. 나 같은 어른이 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기다림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무서움을 참는 방법은 상상과 기다림이었습니다. 나쁜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인생은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느 순간부터 알았습니다.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나쁜 장면을 떠올릴 수 있다면 그 장면은 이뤄지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나는 나쁜 상상으로 미래를 기다렸습니다. 미래는 어두웠고, 걱정이 많았고 두려웠습니다. 다가올 날은 불안하고 기다리는 일은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아픕니다.


움직이지 않고, 말하지 않는 식물이 좋습니다. 살아갈 수 있는 최적의 형태로 아무도 모르게 매일 자라는 식물이 좋습니다. 세상과 단절된 것 같으면서도 가장 많이 열려 있고, 누구보다 기다림이 편안합니다. 물이 없으면 고개를 숙였다가, 비가 오면 얼굴이 들면 됩니다. 들을 수 없는 절절한 노래를 부를 수 있고 애쓰지 않아도 평생 아름답습니다. 시들면 떨어지고 떨어지면 또 납니다. 두근거림은 뿌리내린 흙만 알 뿐입니다. 흙만 알면 됩니다. 식물은 나와 너무 다릅니다. 나는 식물이 좋습니다.


꽃향기를 맡으며 글을 읽습니다. 글이 눈에 들어오다가 저도 좋은지 향기를 맡습니다. 글자 대신 바람이 들어옵니다. 풋내를 담은 바람이 교실 화분을 지나 내 무릎을 베고 눕습니다. 쿵쿵거리는 내 심장소리를 가만히 듣더니 마음씨 좋은 한의사 선생님처럼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러고는 말해줍니다. 사실은 내가 식물을 닮았고 꽃을 닮았다고 합니다. 나는 가만히 웃고 나를 보는 그 아이도 웃고 꽃을 담은 바람은 지나갑니다.


나는 더 크고 깊게 숨을 쉽니다. 숨 쉴 수 있어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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