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지지 않을 용기

불안의 목적

by 물지우개

어제 시어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아가 요즘은 어떤노, 연이는 괜찮나, 병원은 다녀왔나. 아니오, 병원은 다음 주 화요일에 가요. 그렇구나. 병원 다녀오면 나한테도 알려주라. 그런데 괜찮을 거다. 연이는 얼굴이 예뻐서 괜찮다. 그리고 나 아직 아무한테도 말 안 했다. 수술하게 되면 말할까 아직 주변에 알릴 생각 없다.

나 역시 마음속으로는 괜찮다. 완치는 없지만 통증이 없고, 죽을병 아니고, 발달된 의학으로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 정도가 달라서 그렇지 병 없는 사람 없다. 이 기회로 운동 습관이 생겨 평생 몸 관리한다면 오히려 잘 된 일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생기는 불안도 모래성을 쓸어버리는 파도처럼 허물어 버렸는데 시어머니 전화 한 통에 내 모래성이 만리장성이 되는 느낌이다.


얼굴이 안 예쁘면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주변에 알리지 못할 만큼 부끄러우신가요. 어머니의 자발적 입막음마저도 제가 책임져야 할 일인가요. 만리장성에 꽂힌 많은 깃발처럼 뾰족한 질문들이 펄럭거렸지만 난 하나도 묻지 않았다. 아직도 나는 그 병이 연이 인생에서, 아니 내 인생에서 튀어나온 모난 돌이라고 생각하고 있구나, 나 역시 그 병을 내 삶의 일부로 매끈하게 다듬지 못했구나. 나는 시어머니께 던지려던 돌멩이를 나한테 던지고 말았다. 전화를 끊고 나서 기특하게 잘 참던 눈물을 기어이 쏟아내고 말았으니.


아들러의 목적론에 의하면 불안도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한다. 회사에 가기 전에 불안하다면 회사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회사에 가고 싶지 않다는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불안을 만든다는 뜻이다. 내 불안의 목적은 무엇일까. 연이의 병을 병이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 연이의 병은 결코 내 책임이 아니라는 다짐, 나는 연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인정의 욕구, 결국 연이는 스스로 이겨내고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욕심이 아닐는지. 그 어떤 것도 확신이 없으니 나는 계속 불안의 에너지로 내가 닿고자 하는 마음에 가려고 하는 셈.


다음 주 화요일에도 지난번처럼 너무 늦었다는 말과 비슷한 강도의 말을 듣게 될까 봐, 설령 듣게 되더라도 병을 가진 딸 앞에서 결코 하면 안 되는 모습을 보여줄까 봐, 엄마가 좌절로 점철된 말과 행동을 쏟아내어 딸마저 비관의 구렁 속으로 밀어버리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하기에 나는 내 불안이 불안의 목적을 달성할 수만 있다면 그냥 이대로, 불안한 대로 내버려 두기로 한다.


철학자 알랭은 [행복론]에서 비관주의자는 기분에 속하고, 낙관주의자는 의지에 속한다고 했다. 불안은 비관에 가까워 보이지만 내 불안은 낙관의 목적을 가지고 있기에 일회적 감정의 표출이 아니라 지속해야 하는 의지로 보기로 했다. 연이 생각으로 나는 자주 어두워지고 눈물이 나지만 시시때때로 웃을 수 있다. 병을 알게 된 후 냉정하게 흐르는 시간이 두렵지만 공정하다 생각한다. 가족에게 못나고 뾰족하게 굴지만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어 후련하다. 나는 불안하지만, 불안해서 괜찮고 앞으로도 괜찮을 것이다.


병을 알고 나서 연이와 나는 훨씬 친해졌다. 몰랐는데 나보다 큰 덩치도 귀엽고, 손 끝 거스러미가 아프다고, 밴드 붙여달라고 징징거릴 정도로 어리다는 사실도 알았다. 나는 연이가 좋아하는 걸 그룹의 노래로 연이와 한편 먹고 토론할 수 있다. 내 보호를 받을 날보다 내 품을 떠나 자기 인생 찾아갈 날이 더 가깝다 생각하니 마음껏 딸을 안을 수 있는 지금이 소중하고 감사하다.


연아, 가끔은 너를 보다가 엄마가 슬퍼하거나 우울해하거나 불안으로 흔들리더라도 엄마는 엄마의 삶을 살아내는 엄마만의 용기라고 봐주면 좋겠다. 엄마의 불안은 긍정의 목적을 가지고 엄마를 이끌고 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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