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물이 흐른다.
병원에는 사람이 많았다. 대기가 길었고 복도에는 사람들로 양쪽이 빼곡했다. 드디어 딸 아이를 부르는 목소리가 복도를 울리고, 우리는 진료실로 들어갔다. 드디어 만난 교수님의 언어는 간간이 좌절이었고 대부분 희망이었다. 내가 무엇을 기대했는지 모르지만, 분명 우리를 보는 눈빛은 따뜻했고 안쓰러웠다. 내 호주머니에는 헝클어진 머릿속을 드러내지 않으려, 그래서 후회하지 않으려 애써 적은 질문지가 있었지만 꺼내지 못했다. 나는 마스크로 얼굴의 대부분을 가렸지만 오로지 표정으로 내가 말하고 싶은 한가지, 간절함만을 피력했다(고 생각한다).
다시 눈물이 터졌다. 유일한 희망이라고 믿는, 한 달을 기다린 치료법이었는데 그 치료로 힘들어하는 아이를 지켜보는 일은 상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픈 건 아이인데 눈물은 내가 흘리고 있다. 나는 딸에게 가장 부끄럽다. 세상 사람들 다 눈치채도 너에게는 내 슬픔을 들키고 싶지 않은데, 들키면 안 되는데 너만 보면 왜 이리 눈물이 쏟아지는지. 어쩌면 나는 눈물을, 슬픔을 즐기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나는 슬픔을 즐길 정도로 좋아하는 사람인가보다. 필요도, 당위성도 없는 눈물이 자동반사적으로 나오는 걸 보면 그 이유 말고는 딱히 설명할 수가 없으니까.
컴컴한 새벽부터 먼 길을 달려 찾아간 그 병원에 들어선 순간부터 나는 직감했다. 오늘부터 새로운 불안의 시작이구나. 내 생존을 위하여 다른 모습의 불안이 출발했구나. 이전의 불안과 새 불안의 틈을 슬픔이 메우겠구나.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불안의 개념’에서 불안을 ‘자유가 경험하는 현기증’이라고 했다. 자유로운 사람은 늘 불안하다는 뜻이다. 자유를 원할수록 더 큰 불안과 마주한다는 뜻이다. 수술을 피하려고 내가 선택한 치료법이었다. 확신이 없고 희망도 크지 않다. 불안하지만 내 불안은 격려가 필요하지 않다. 종종 터지는 눈물은 낙관을 향한 불안이 내 안에서 튼튼하게 자리 잡는 모습일 뿐이다.
갓난아기를 키우는 일은 힘들었다. 처음 겪는 육아는 내 삶의 질을 크게 떨어뜨렸다. 충격이 컸고 우울했다. 유모차를 끌고 놀이터에 나가면 ‘엄마!’ 하며 달려오는 아이들의 엄마가 어찌나 부럽던지. 내 아기가 나에게 ‘엄마’라는 말을 하며 달려오기까지 나는 얼마나 더 고통스러워야 하는지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매일 행복했지만 날마다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끝없는 스트레스는 분명 힘든 도전이지만 자식은 포기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아이가 자라듯 그 도전이 매일 티끌만큼 나를 사람으로 다듬기 때문이다. 아이와 함께 하는 매 순간이 내 가치를 증명하기 때문이다. 부모로 산다는 것은 누적된 스트레스 극복으로 매일 조금씩 나은 인간이 된다는 뜻이다. 나는 내 스트레스만 보이고 내 스트레스가 가장 크다 느낀다. 딸의 아픈 몸은 나를 사람으로서 더 정교하게 다듬는 일임이 틀림없다.
아이의 표정과 말투, 눈빛과 지나가는 몸짓도 허투루 보이지 않는다. 나는 훨씬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 자꾸 생각하고 자주 울지만, 많이 듣고 어느 때보다 강하게 눈물을 참는다. 건빵 과자처럼 지루하고 목 막히는 엄마의 삶이지만 대부분 바삭하고 고소해서 편안하다. 게다가 별사탕이라니! 내가 엄마가 아니었다면 결코 알지 못하는 보석 같은 달콤함도 분명 존재한다. 나는 잠이 덜 깬 너에게 다가가 볼을 마음껏 비볐고, 너는 ‘엄마’라고 크게 부르면서 퇴근한 나를 덥석 안아주었으니까.
툭툭 날아드는 위로에 슬픔이 더 무거워지고, 기대와 다른 공감이 나를 뾰족하게 찔러도 말의 가벼움을 알기에 괜찮다. 전처럼 아파도 전보다 오래가지 않는다. 내 불안의 센서는 민감하지만 신선하다. 상처를 묵혀두고 기억할 만큼 불안의 지층이 오래가지 못한다. 매일 새로운 불안이 쌓이기 때문이다(좀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있음이 틀림없다!). 프랑스시인 에르베 바쟁은 “강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물이 흐른다. 세월이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나간다.”라고 했다. 나는 아픈 아이를 키우며 마음껏 슬퍼하고, 실컷 울 것이다. 늘 불안해하고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다. 그렇지만 매번 도전하고 조금씩 나아질 것이다. 그렇게 엄마가 되고 사람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