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h. 두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BWV 1043. 1악장
건조하다. 눈이 바짝 마르는 느낌. 눈꺼풀이 내려왔다 올라갈 때 빨래판을 긁는 듯 뻑뻑하고 불편한 느낌. 건조한 눈으로 책 읽기가 힘들어지자 대기가 매우 건조하니 산불을 조심하라는 기상캐스터의 말이 기억났다. 가습기와 에어워셔가 열일해도 내 집의 H2O는 고갈 위기다. 나는 빈 밥솥에 다량의 물을 틀어 담고 취사 버튼을 누른다. 그리고는 속히 기화되기를 간절히 기다린다.
나는 건조했다. 분명 W와 나는 서로 마음에 들었다. 심장이 뛰었고 얼굴이 빨개졌다. W가 먼저 말 걸어 주기를 기다렸다. 나를 향한 W의 감정 또한 흡수력이 뛰어난 수건처럼 보송보송하다는 것을 눈치챘을 때 나는 기뻤다. W에게 젖어들고 싶었다. 풋풋하지만 예쁜 감정이 시작이었다. 막상 W가 속내를 확 펼쳤을 때 나는 말도 못 하게 건조해졌다. 오그라드는 습한 감정이 부끄러웠다. 도망가고 싶었다. W는 하릴없이 떠났다. 나는 W를 향해 잘 가라고 손 흔들었다. 돌아서자마자 메말랐던 감정이 축축해졌다. W의 뒷모습이라도 보려고 눈을 찡그려가며 찾았다. 어긋나는 습도 타이밍에 나는 스스로를 비관했다.
밥솥의 구멍에서 허연 증기가 나온다. 부글부글 거품도 보인다. 나는 뜨겁지 않을 만큼 얼굴을 가까이 댄다. 빌어먹을 습도 타이밍 덕분에 건조한 눈은 진작 감고 있다. 눈이 건조해서 밥솥까지 동원했건만 눈은 떠지지 않는다. 이 밥솥이 만들어질 때 이런 얼토당토않은 용도로 쓰이리라고 어디 상상이나 했겠느냐고! 밥솥은 촉촉한 밥을 짓고 싶다고! 나름 숭고한 목적이 있다고요!
대학 가서 처음 좋아한 K가 생각난다. 내가 시도 때도 없이 촉촉한 감정을 발사해도 K는 결코 흡수하지 않았다. 건조하게 친절할 뿐이었다. K는 건조한 상냥함으로 나에게 말을 걸었고 건조한 자상함으로 내 말을 들었다. 그의 건조함은 나의 넘치는 습기를 절대 머금지 않았다. 나는 그의 이기적인 건조함에 진절머리가 나서 찢어버리고 싶은 분노가 일었다. 그의 건조함에 지쳐 불 싸지르는 악마가 될 것 같아 하릴없이 잘 가라고 손 흔들었다. 나의 촉촉함이 너무 고단해서 더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요.
이후 몇 번의 남자를 만났지만 나의 습도는 늘 실패였다. 나의 메마름은 그의 습기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나의 축축함은 그에게 젖지 않았다. 내 습도는 이미 나에게 버림받은 지 오래다. 자존감이라는 말은 나처럼 자신에게 존중받지 못하는 불쌍한 인간이 세상에 참으로 많다는 것을 반증한다. 오죽하면 ‘자존감’이겠냐고...
창가의 율마가 노랗게 타들어간다. 너도 지금 건조함에 몸부림치는 중이구나. 온몸으로 습도를 조절하려 노력해도 손가락, 발가락, 말초신경부터 바싹바싹 말라가는 네 몸이 끔찍하게 싫겠지. 한번 타기 시작한 율마는 하루가 다르게 말라 결국 뿌리까지 내려간다던데. 그렇지 않아도 동네 미용실에서 타서 죽기 직전의 흉측한 율마를 향해 나는 분무기를 뿌렸다지. 죽는 마당에 무슨 도움이 되겠냐마는 죽더라도 물은 한 모금 마셔보고 죽어야 덜 한스럽기 않겠느냐며. 막상 내 율마가 저 지경이 되니 분무기가 아니라 나는 가위를 들고 온다. 과감히 타기 시작한 끝을 잘라 버린다. 이런 건 아예 시작부터 싹을 잘라 내야 돼. 그리고는 화장실 거울 앞에 선다. 건조를 실감케 하는 푸석푸석한 머리카락 끝을 나는 가위로 잘라버린다. 싹둑 잘린 징그럽고 메마른 머리카락들을 향해 나는 샤워기를 틀어 물을 뿌렸다. 건조함이여 안녕, 부디 잘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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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위'가 사실 좀 건조하죠. '화성'은 서로를 흡수하여 화학적 반응을 일으키는 반면 대위는 두 선율이 누가 더 건조한가 대결하다 닮아가는 미학이랄까? 습도조절에 번번히 실패하는 자신이지만 어쩔거에요. 사랑받아야하고 사랑을 주어야하는 존재인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