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렉시트와 장거리연애
회사의 비자스폰서십과 브렉시트
영국 회사의 대표가 워킹 홀리데이 비자 만료일 한 달 전에 상담을 요청했다. 입사할 때 이미 우리 회사는 비자스폰서십을 지원해 줄 수는 없다는 것을 들었던 터라, 벌써 퇴직절차를 밟는 건가 입이 말랐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그동안 정말 수고 많았다고, 고맙다고, 더 오래 함께하고 싶다며 내 워크 비자를 지원해 주겠다고 했다. 3년짜리 워크 비자였다. 나와 남자친구였던 곰은 하루종일 입이 귀에 걸려 있었고 한국의 부모님의 눈썹은 갈 지자로 슬퍼졌다. 이렇게 워킹 홀리데이 성공사례가 되는 줄 알았던 날엔 나중에 내가 브렉시트의 피해자가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외국 공항 프로젝트의 항공사 클라이언트가 브렉시트 결과에 보복성 계약철회를 했다. 2017-2018년의 영국에는 그런 식으로 작은 회사들이 넘어지는 일이 잣았다. 영국에 사는, 원래 비자가 필요 없던, 다른 EU 국가에서 왔던 의사, 간호사들도 영국 워크 비자를 받기 위해 줄을 섰다. 런던에 거주하던 한 동유럽 출신의 의사가 6개월을 기다려 비자를 받았다고 뉴스에 나왔을 때 나는 거의 절망했다. 의료업은 비자 승인 순위의 최상위에 있는 분야고, 경제가 어려워질 때 최하위로 밀리는 분야는 예술, 디자인 분야니까. 그렇게 내가 7개월을 기다려 영국 정부의 워크 비자 승인을 받았을 때 사람들이 다 기적이라고 했다. 근데 그땐 이미 회사에서는 나를 재고용할 명분이 사라진 뒤였다. 안타깝지만 네가 맡았던 프로젝트가 사라져 너를 재고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추석에 고향집에서 국제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멍하니 영국의 친구 집에 놓고 온 내 자전거를 떠올렸다.(‘데미안의 집 b’/ 매거진 ‘당신의 집’ 참조) 그리고 다음 날 예정보다 하루 일찍 서울로 돌아갔다. 아이고 라고 말하면서도 내가 영국에 돌아가지 않아 사실은 안도하며 웃는 엄마, 아빠의 얼굴이 마치 회사에서 3년짜리 워크 비자를 준다고 했을 때의 아무것도 모르는 내 표정 같아서. 그리고 그렇게 곰과의 장거리 연애가 시작됐다. 바보 같은 우리는 그게 5년이나 지속될지 몰랐기 때문이다.
롱디커플의 3년간의 해외 데이트와
2년간의 온라인 데이트
이번에는 네가 올래, 다음엔 내가 갈까, 일본에서 보는 건 어때, 이번 여름에 그리스에서 만날까 서울-런던 장거리 연애를 하게 된 우리는 휴가를 맞춰 일 년에 두세 번 매번 다른 나라에서 만났다.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이 주일씩 함께 지내다가 각자의 나라로 떠나는 날에 공항에서 나는 항상 또 사람 죽은 것처럼 울었다. 인천공항에서도, 히스로 공항에서도(환란의 세대, 이랑). 그리고는 각자 나라로 돌아가 하던 대로 매일 서울의 밤에, 런던의 낮에 통화를 했다. 여름엔 그나마 8시간 차이가 났고 겨울엔 9시간 차이가 나니 곰은 나에게 항상 ‘과거’에서 전화를 거는 사람이 됐다. 곰에게 아침에 얼마나 더웠는지, 동료가 얼마나 일을 못하는지, 저녁에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실시간으로 토로 또는 자랑하는 대신, 나는 꽤 괜찮은 하루를 보냈으니 너도 좋은 하루를 보내라고 말했다. 내가 잠들기 전에 잘 자라고 말하기 위해서 점심시간에 제일 먼저 나가 회사 옆 공원으로 가는 길에 산 샌드위치를 길에서 급히 해치우는 그의 정성을 알았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래도 조금 속상한 날도 있기는 했었는데, 항상 하루 내내 기다렸다가 해피뉴이어, 해피 추석, 메리크리스마스 같은 것들을 겨우 잠들기 전에야 들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때때로 내가 곧 깨어나면 보라고 그가 잠들기 전에 미리 보내 놓은 메시지를, 기상해서 본 날은 하루 종일 행복해지기도 했으니까. 결론적으로 우리의 장거리 연애도 좋았다가 서운했다가 그러니까 말하자면 대부분의 다른 연애와 비슷했다. 서로가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들여 만나고자 하는 걸 믿는다는 전제하에.
틈만 나면 우리는 각자 서로의 나라에 건축직을 알아봤다. 그러나 비자 없이 상대방의 나라로 취업을 준비하는 것은 나에게나 곰에게나 모두 어려운 일이었다. 같은 나라에 함께 사는 방법 중에 제일 쉬운 방법은 혼인신고 하는 것이다는 결론에, 저녁을 함께 만들다가 도달했다. 안 되겠다, 우리 결혼할 수밖에 없겠다고 아쉽다는 듯이 내가 말했고 스파게티면을 삶던 옆의 곰이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라고 하는 바람에 바보 같은 우리는 결혼을 했다. 근데 바로는 못했다. 비혼주의자였던 내가 결혼을 하려고 결심하니 코로나가 터졌다. 전 세계 나라들에서 하나둘씩 공항을 봉쇄하기 시작했다. 당시에 한국에 나를 만나러 와서 서울에 머물고 있던 곰의 비행기가 3번이나 취소가 됐었는데 어느 날 그에게 내일 영국행 비행기가 하나 운행될 예정이니 그 비행기를 타고 나가라고 주한영국대사관에서 전화가 왔다. 자국민 안전조치라고 했다. 한국에 가만히 있는 게 더 안전할 것 같은데 영국으로 돌아가라니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지만 다음 비행기가 언제 있을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이유가 어찌 됐든 무비자로 90일 이상 머무르는 것은 위법이라고도 했다. 다음 날 곰은 바로 출국했다. 배우자 비자 신청 계획이 있는 사람들은 무엇이든 정부에서 하라는 대로 하게 된다. 비자 심사라는 것은 어떤 위법 기록도 없는 사람들도 이유도 모른 채 탈락하는, 그런 막막하고 무시무시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갑자기 생이별을 하고 나는 텅 빈 인천공항에서 또다시 사람 죽은 것처럼 울었다. 매번 우는 나를 달래주던 건 곰이었는데 그날 처음으로 공항에서 그가 울었다. 마스크 안에 콧물과 눈물이 가득 차서 여러 번 마스크를 바꿔 껴야 했던 나는 깜짝 놀라서 울음을 멈췄다. 누구 하나는 다른 하나를 달래야 하니까. 그 인천공항을 뒤로하고 우리는 2020~2021년 2년간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대신 매일 영상통화를 했다. 진짜 뭐라도 잘 모아놔야 하는 게, 그때 영상통화했던 것을 매일 스크린샷으로 찍은 것을 배우자 비자 심사 서류에도 요긴하게 썼기 때문이다. 운이 좋게 한 번에 비자 심사가 통과되자 우리는 얼굴을 알 수 없는 그 비자 심사관(들)이 코로나도 갈라놓을 수 없었던 우리의 연애 특히, 수백 장의 스크릿샷에 감동한 것이라고 농담도 자주 했다. 그러다가도 2년이나 못 만나게 될 거라는 걸 처음부터 알았더라면 계속 만났을까라는 ‘만약에 타령’을 나는 자주 했었는데. 곰은 그 대답을 알아서 그 타령을 싫어했다.
내가 바보 같은 말을 한 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중에 제일은 우리 코로나 국경 봉쇄가 풀릴 때 더 탄탄한 회사(모기지 대출에 용이한)에 다니는 사람이 있는 나라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하자고 했던 것이다. 거기에 곰은 이의 없이 동의했는데 알고 보면 얘는
똑똑한 것이었을지도. 그래서 직원이 300명인 회사에 다니는 곰이 있는 런던으로, 직원 4명 회사에 다니던 서울의 내가 이주했다. 37년 동안 모은 짐을 캐리어 3개로 줄이는 일은 얼마나 속 시원하고 고통스러운 일인지 나는 내가 고르고 골랐지만 다 가져가지 못한 짐들을 부모님 댁으로, 친구집으로, 아름다운 가게로 보내며 몇 번을 울었다. 그게 더 많이 가져가고 싶어서인지, 짐은 어떻게 되던 상관없으나 내가 남고 싶어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조금씩 모두 다였겠지.
나는 이렇게 지난한 일들을 겪으며 런던에 살다가 강제로 서울로 돌아갔다가 씨발 내가 돌아가나 봐라 했던 영국에, 배우자 비자를 들고 5년 만에 돌아왔다. 어쩐지 항상 긴장하게 되는 입국 수속에서 내 서류를 확인하던 입국허가 담당자가 내 여권 비자 스티커에 스탬프를 쿵 찍으며 결혼 축하해! 영국에 다시 온 걸 환영해라고 했을 때 다리에 힘이 풀리고 눈물이 조금 나왔다. 이 글의 모든 문장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느라. 과거의 나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왜 영국에 내가 온다고 했을까. 이민자체만으로도 큰 어려움이지만 주로 취업이 너무 길어지면서 그 말을 본격적으로 후회하게 된다. 그 어려웠던 영국에서의 두 번째 취업 후기를 매주 누나 영국 가면 한국 언제 와? 수요일에 와 할 때 그 수요일에 하나씩 할 거라는 얘기를 이렇게 길게 썼다.
-당분간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