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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춥다물 Feb 28. 2024

내가 어쩌다 다시 영국에 1

서른에 워킹홀리데이

서른에 워킹홀리데이

 5년제 건축학과 졸업 후에 인턴으로 일했던 건축사사무소에 입사했다. 그곳에서 만난, 클라이언트 회사의 공간 디렉터로 스카우트되어 떠났던 사수의 권유로 따라간 인테리어팀에서 2년째 근무하던 중이었다. 끊임없는 업무와 혼자 감당하기에 너무 많이 늘어나는 현장들은, 내가 조금 잠을 줄이고, 밥을 허겁지겁 대충 먹으면 해결이 될 것 같았(같겠냐고)는데, 철석같이 믿고 따르던 사수가 4년 전만큼 멋있고 대단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나는 구멍이 난 풍선처럼 점점 단단함을 잃어갔다. 점심시간에 같이 식사를 하자는 동료들을 줄줄이 뿌리치고 초콜릿 하나를 들고 혼자 양재역 방향으로 걸었다. 이번 주에만 내가 이렇게 커피와 초콜릿만을 삼킬 수 있었던 날을 한 손으로 다 셀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나는 39kg였다.


 번아웃이라는 것을 그때의 나는 몰라서, 도망가겠다고 외치는 나와, 도망가냐고 다그치는 나와의 전쟁을 마음의 지옥에서 치렀다. 다그치는 쪽을 설득하려면 단순한 퇴사, 이직을 넘어서는 큰 명분이 필요했다. 외치는 쪽이 나이 제한이 내년에 끝나는 워킹 홀리데이를 가는 것이 가장 적합하겠다고 결론을 냈다. 건축 디자이너가 영국으로 간다고 하면 다들 그게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간이 가장 길어서 선택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설득이 되니 내 안에 다그치는 쪽이 점점 사라졌다. 나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타인을 설득하는 일은 정말 궁지에 몰린 사람들이 하게 된다는 것을 이때 알게 됐다. 원래 회피형 인간은 아닌데 정신이 피폐해져서 성향이 재난모드로 바뀌었던 것도 같다.


 (영국으로 갈 거야) 워홀이 가능한 국가 중 가장 적은 인원을 뽑으며, (영어능력 증명서도 내야 하더라고) 자신이 아는 어떤 영문학과 학생도 지난해 접수했는데 떨어졌으며, (만 30세까지는 가능해) 지금 가기엔 좀 늦은 거 아니냐며, (뭐 일은 구하면 되지) 잘 돼야 스타벅스에서 바리스타로 일하다가 돌아온다는대도 가겠냐는 주변사람들도 나를 더 이상 불안하게 하지는 않았다. 근데 막상 선정 발표도 나기 전에 회사를 미리 그만두고 짐을 정리하는데 씨발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하는 거대한 공포가 갑자기 밀려왔고 그 덕에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나는 그 악몽 속에서 쫓기고, 떨어지고, 갇히고, 잃어버리고 울었다. 소리를 지르며 깨어나면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짐을 쌌다. 하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영국에 가게 될 것이라는 것을. 영어능력 증명서로 나는 아이엘츠 성적서를 제출했는데 시험비용만 22만 원으로 존나 비싸기도 하고 두 번 치고 싶지는 않아서 연습문제를 정말 열심히 풀었다. 그중 독해는 내가 가장 자신 없었던 영역이다. 시험지 앞면에서 시작해 뒷면으로 넘어가는 긴 전문 칼럼을 읽고 배점이 높은 서너 문제를 연달아 풀어야 하는 지옥의 관문이었다. 그 주제는 역사, 인문, 과학 어느 것이든 될 수 있었지만 나는 시험 당일 시험지를 받아 들고 실제로 실소가 터졌는데 지문의 주제가 바로 ‘르코르뷔지에의 건축’이었기 때문이다. 지문을 읽지 않고도 3문제를 다 풀면서 그냥 알게됐다. 아 내가 이 문제를 풀려고 건축학과 등록금을 5년이나 냈구나, 나 영국에 가겠구나. 그걸 안다고 불안하지 않은 것은 또 아닌데, 몇몇 친절한 사람들이 거의 비행기표를 취소하려고 했던 그때의 나를 살렸다. 외할머니가 대단하다, 영국 가서 좋은 사람 만나서 데리고 오라고 했던 것과 초등학생 막둥이 사촌 동생이 누나 영국 가면 한국 언제 와? 수요일에 와! 했던 말에 조금은 웃을 수 있었기에. 왜, 웃을 수 있으면 조금 힘도 낼 수 있을 것 같잖아. (결론적으로 영국에서 남편을 데려와 7년 후에 외할머니 앞에 한복을 입혀 앉혔고, 한국에 돌아왔던 날은 나중에 생각해 보니 3월 14일 수요일이었다.)


 편재가 2개가 든 서른 살에 영국살이와 말 많은 팀원

 몇 년 전에 인터넷으로 운세를 보니 나는 나이가 0으로 끝나는 해에 대운이 든다고 했다. 2016년 영국에 왔을 때 그 사실을 알지는 못 했지만 나는 그 해 서른 살이었다. 나중에 더 자세히 보니 그중에서도 30세는 편재가 2개 든 해였었다. 그건 뭘 하기만 하면 다 된다는 뜻이라고 그랬다. 그래서 말도 안 되게 중심가인 쇼디치역 1분 거리에서, 월세를 £430(‘엠마의 집 b‘, ’카밀의 집’ 참조 /당신의 집)만 내고 살았고 친구 생일 파티에 샘 스미스가 지나가다가 들렀으며, 영국에서 공부하거나 일한 경험 없이, 영국의 건축 회사에 들어간 것이었구나 하고  지금의 나는 입을 벌린 채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회사 입사 몇 개월 후, 어느 말 많은 새로운 동료가 우리 팀으로 들어왔다. 프로젝트 1차 제출일, 금요일 오후 팀원들 다 같이 회사 근처 펍에서 맥주를 마시고, 회사에서 제일 말이 없는 나와, 그런 나에게 제일 말을 많이 시키는 그 동료는 내 자전거로는 30분이 채 안 걸리는 쇼디치까지 2시간이 넘는 길을 같이 걸어가는 데 바보같이 동의하는 바람에 우리는 회사 바보들, 아니 동료들 아무도 모르게 사귀기 시작했다. 앞으로 얘랑 얼마나 더 많은 바보 같은 선택을 하게 될까 생각하니, 걱정보다는 얘랑은 바보 같은 선택들도 같이 웃으며 하고, 짧은 길도 멀리 돌아가도 재밌겠다 싶어 미소가 지어졌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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