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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춥다물 Mar 13. 2024

한국을 떠나던 날

이민가방 3개, 두고 온 식기세트와 커피

 회사에서 만난 팀원들과 죽이 잘 맞는다는 것은 하늘이 내린 운이 여러 개 겹쳐져야만 일어나는 일인데, 그게 내가 이민오기 전 마지막으로 다녔던 회사에서 일어났다. 차팀장님과 안소장님이 바로 그 주옥같은 팀원들이다. 이민오기 일주일 전까지 다녔던 회사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인사하는 날, 소장님, 하자마자 내 목소리가 염소소리로 나오고 눈물이 이마까지 차올랐다. 옆에서 인턴이 춥팀장님 설마, 지금 우시는 거 아니죠?라고 해서 모두들 크게 웃었다. 그 두 분이 이민 간다고 쥐어 준 여러 가지 중, 내가 정말 사랑했던 커피 원두와 예쁜 밥국그릇 세트를 못 가지고 온 한을 담아, 길고 뜨거운 편지를 썼었다. 이렇게.





안소장님


 소장님 더움과 습함 사이에서 잘 지내고 계신가요? 역삼과 경복궁역의 여름이 얼마나 뜨겁고 시끄러웠을까요? 이번주는 런던도 오랜만에 30도를 넘어갔습니다. 오늘은 32도일거래요. 조금 있다가 4도가 더 오를 거라고 생각하니 28도가 조금 시원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어제 커피를 마시다가요. 갑자기 제가 마시고 있는 커피 맛이 똥맛이라는 걸 다시 한번 느꼈어요. 그 직후에 제 기억 속의 회사 풍경이 펼쳐지더라고요. 그래서 사이렌의 김희정 운동팀 대장의 가상의 볶음밥처럼, 출근하고 커피 내리는 장면을 복기해 봤어요. 그게 너무 생생해서 소장님한테 알려야겠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적어봐요.


 때는 월요일 아침이에요. 회사에 가기 싫어서 거의 울면서 일어났던 2019년과 다르게 2022년엔 한 시간이나 일찍 일어나서 버스에 탑니다. 1시간 반이나 걸리는 긴 여정이지만 앉아서 가고 어깨빵, 팔꿈치빵 없이 가는 게 이 무슨 호사냐 하며 팟캐스트를 들어요. 영동대교 지나서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깨어나면 언제나 구 역삼세무서 사거리입니다. 버스 기사님은 항상 여기에서, 한번 놓치면 오래 기다려야 하는 좌회전 신호를 놓치지 않으려고 내리막길을 엄청나게 달리다가 드래프트로 운전대를 꺾기 때문에 꼭 여러 명의 승객들이 어어어 하면서 잠이 깹니다.

 그럼 허겁지겁 정신을 챙기고 가방을 깨워 카드를 리더기에 찍고 내립니다. 오늘도 역시 나의 무대는 사무실인 건가? 하면서 엄지손가락 보여주고 들어가면 일찍 온 소장님이 내린 커피 향이 나요.  


 안녕하세요오~ 하면 컴퓨터 앞의 소장님이 왼쪽 귀의 에어팟을 빼면서 안녕하세요오~ 해요. 안소장님 주말 잘 보내셨는지 물으면 네에-춥팀장 너는 잘 보내셨는지 다시 묻습니다. 전 네-하고  커피 내리고 와서 다 말할 거야 하면서 (할 말이 많은 편) 가방을 옆 책꽂이에 쑤셔 넣고 노트북 전원을 켜요. 손에 소독용 스프레이를 치익- 뿌리고 손을 비비면서 탕비실로 갑니다.


 주전자에 물을 받아요. 정수기의 뜨거운 물이 손에 튈까 봐 멀찌감치 서서 물이 떨어지는 것을 바라봅니다. 제 왼쪽으로 소장님이 열어둔 문으로 밖의 소음과 공기가 들어오는 것이 느껴져요.  250ml가 자동으로 받아진 주전자에 물을 조금 더 추가합니다. 컵을 따뜻하게 할 여분의 물입니다. 주전자 손잡이를 들고 오른손으로 이제 커피콩을 갑니다. 드리퍼 위에 재생지로 만든 필터를 깔고 뜨거운 물을 한 바퀴 돌립니다. ‘이렇게 해야 필터 종이맛이 사라진다고 훈이가 알려줬다고 근데 나는 귀찮아서 안 한다’고 하는 안소장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자동 그라인더 소리가 위잉에서 웨엥-으로 넘어가는 찰나 정지 버튼을 누릅니다.

 갈린 원두를  드리퍼에 알뜰하게 다 모으고 커피 그라인더 안을 한번 털어냅니다. 손바닥에 힘주어 턱턱 턴 후 커피가루가 묻은 손바닥을 물에 가볍게 씻어요. 근데 수건걸이에 수건이 없어요. 아 오늘 월요일이라 차팀장님이 금요일에 가져가신 수건 빨아가지고 오시겠구나 하면서 수건이 비어있는 곳을 바라보며 대신 바지 뒤춤에 손을 앞뒤로 훔칩니다. 우리가 솔선수범해서 조금씩 닦고 치우고 했던 작은 사무실이었지요. 마음이 맞지 않으면 작은 지옥이 되기도 한다는 걸 우리 모두 알았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합니다.


 이제 거의 준비가 됐습니다. 저울 위에 머그잔과 드리퍼를 포개어 얹습니다. 이제 제 하얀 머그잔을 찾습니다. 안소장님이 우리 모두에게 사준 컵이 개수대 위에 바글바글 뒤집어져 올라가 있습니다. 물기 없는 널브러진 유리잔을 몇 개 겹쳐 자리를 만들고 있는데 디리딩~ 문 밖에서 누군가의 손가락이 닿았다 떨어졌습니다. 차팀장님이 몸을 작게 만들고 시선은 바닥을 보면서 들어옵니다. 작은 소리로 안녕하세요오- 합니다. 그가 출근과 퇴근 때 눈을 잘 마주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끝까지 제 시선은 그를 따라가며 안녕하세요오- 합니다. 오늘도 눈을 마주치는 것은 실패했습니다. 아차 정신 차립니다. 차팀장님이 곧 이 좁은 탕비실로 들이닥칠 겁니다. 저는 마음이 바빠집니다. 오늘 같은 날 저울을 사용하여 정교하게 커피를 내리겠다는 것은 욕심입니다. 얼른 저울 위에 머그잔과 드리퍼를 싱크대 위로 내리고 저울은 제자리에 가져다 놓습니다. 이제 커피 위에 뜨거운 물을 붓습니다. 그때 차팀장님 수건이 든 것이 틀림없는 쇼핑백을 가지고 좁은 탕비실로 다가옵니다. 몸을 싱크대 쪽으로 바짝 붙이고 주전자를 들고 시선은 드리퍼 위에 고정시킨 후 웃으며 말합니다.

    차팀장님~ 주말 잘 보내셨어요?

    네에- 휴

한숨을 쉬며 차팀장님은 수건 하나를 쇼핑백에서 빼서 수건걸이에 겁니다. 전 첫 번째 물을 30ml 부은 후 원두가 부풀어 오르기를 30초 정도 기다린다는 포스트잇 쪽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속으로 초를 셉니다. 동시에 차팀장님의 ‘휴—’가 혼자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게 끌어올립니다. 시선은 드립퍼에 고정시킨 채 오른쪽어깨만 차팀장님 방향으로 살짝 틉니다.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으셨어요?

    아니 우리 애 때문에…글쎄 주말에,

주말에 은이가 친구들에게 섭섭했던 일이 있었나 봅니다. 차팀장님은 자신이 은이가 된 것처럼 슬픈 얼굴로 이 이야기를 얘기합니다. (이십 초) 아 진짜요? (삼십 초쯤 됐겠다) 헐 너무 나빴다. (남은 물을 두세 번에 나누어 커피가 꺼지기 전에 다시 물 두르고) 일부러 그랬네. (어어 커피가 내려앉았다. 안돼) 아이고 엄청 속상했겠네요.


 오른손과 눈은 커피에게, 귀와 입은 은이, 아니 차팀장님에게 줍니다. 이제 물을 다 부었어요. 휴 다행입니다. 커피가 다 내려지면 젖은 커피필터를 대기용 접시로 옮깁니다. 이 젖은 필터는 물기가 가시기 전까지 여기서 반나절을 대기할 거예요.  안소장님, 차팀장님 혹은 내가 마른 접시로 옮기기 전까지. 옆 자리 쟤는 한 번도 치우는 꼴을 못 봤어할 때 그때 까지요.

    춥팀장님

    네?

    그거 저 주실 거예요?

공용으로 사용하는 드리퍼를 헹궈 개수대에 올려놓으려는데 내 앞으로 뻗은 차팀장님의 손바닥이 보입니다. 싱크대에서 물기가 있는 드리퍼의 물을 한번 더 탈탈 털어 그 손위에 살포시 내려놓습니다.

    속상하시겠어요.

    뭐 하루이틀도 아니고. 아유 춥팀장님도 애 낳아봐요.

 그의 손과 눈은 커피에 가 있네요. 이제 내가 비켜드릴 때입니다.

    호호 저 먼저 자리로 갈게요~

 따뜻한 머그에서 향기로운 김이 납니다. 자리에 앉아 꽃향기가 나는 커피를 좋아하게 된 것이 신기해서 마시고 또 마셔봅니다.

    안소장님 이 원두 진짜 맛있어요. 훈님이 알려주신 대로 물을 부었더니 더 맛있는 것 같아요.

    다행이네요. 훈이한테 알려줘야지.

 그 커피, 향기롭고 고소하고 시큼하고 쓴. 놀랍게도 식어도 맛있는 커피. 원두는 그냥 고소한 거 주세요 하던 제가 이 새콤 달콤하게 입안에서 까부는 맛을 알게 된 커피요.


 근데 그 커피 원두가요. 제 커다란 이민 가방에 마지막으로 들어갔던 그 커피 원두가. 영국에는 못 왔어요. 왜냐하면 제 짐가방 3개가 너무 무거워서요. 수하물로 부칠 짐이 38kg, 35kg, 24kg 총 97kg였거든요.

저는 그게 얼마가 됐든 그냥 운임비만 더 지불하면 괜찮을 줄 알았어요. 근데 가방 하나가 32kg를 넘을 수는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럼 대형 화물로 따로 신고해야 한다고. 승무원이 뭐가 들어었길래 이렇게 무겁냐고 핀잔을 줬어요. 제가 쭈글쭈글한 얼굴이 돼서 영국으로 아주 이사를 가서 살림이 다 들어있다고 했어요. 대답을 들으려고 한 질문은 아니었나 봐요. 어쨌든 각각 32kg 이하로 맞춰오래요. 그렇지 않으면 비행기에 싣지 못한데요. 갑자기 등줄기에 땀이 쭉 나더라고요. 그래서 동생이랑 둘이, 사람들 줄 서는 그 체크인 구석으로 가서 38kg 가방, 35kg 가방을 부끄러울 줄도 모르고 활짝 열었어요. 옷, 책, 영양제, 고춧가루 같은 게 보였어요. 무거운 거, 무거운 거 뭐더라. 그릇! 차팀장님이 주신 디자이너 브랜드 그릇세트, 제가 만든 도자기 커피드리퍼, 안소장님이 준 머그, 그 외 도자기를 다 꺼냈어요. 솥밥 해 먹는다고 넣은 작은 돌솥도요. 그리고 원두, 원두가 보였어요. 500g 이것도 빼자.

 그래서 이 가방에서 5kg 빼고 저 가방에서 3kg 빼서 그렇게 뺀 짐만 8kg 더라고요? 그걸 전체 무게 재서 다 부치니까 전체 짐이 83kg가 됐어요. 전 초과 운임비로 45만 원을 더 냈고요. 어쩐지 전체 중량이 아까보다 더 줄어든 것 같았어요. 8kg를 뺐는데 왜 14kg가 준거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어요. 아마 카운터마다 저울이 제각각이었던 것도 있고, 제정신도 아까 같이 빠뜨렸을 테니까요.


 덜어낸 짐을 에코백에 담아서 마중 나온 가족들 중에 동생에게 제일 크고 무거운 거 도자기가 든 가방, 엄마한테는 그릇세트 든 거 작은 가방 하나를 맡겼어요. 원두, 이 원두는 둘째 조카를 낳아서 공항에는 못 온 언니랑 언니 대신에 온 형부가 제일 잘 마셔줄 것 같은 거예요. 둘 다 매일 아침 커피를 마시거든요. 그래서 형부 손을 꼭 잡으면서 얘기했어요.

    형부. 이거 제 옆자리 안소장님 남자친구 훈이 씨가 로스팅해서 준 거예요. 꼭 꼭 잘 마셔주세요?

    누구라고? 그래 알았어. 알았어. 걱정 마. 언니랑 잘 마실게~

    근데 이거 진짜 맛있는 거라고요.(훌쩍거린다)

    알았어~ 아껴서 잘 마실게.

    아니 아끼지 말고 빨리 잘 마시라고요.(본격적으로 운다)

    알았어 왜 울어~ 울지 마~이제 들어가 봐야지

 이렇게 저는 향긋한 원두를 못 가져와서, 아끼느라 써 보지도 못한 그릇세트를 못 가져와서 가족들 얼굴 보면서 공항 라운지에서 왕왕 울었어요. 엄마도 울고 동생도 울고 아빠는 또 볼 건데 뭘 자꾸 울어쌌노 하고 형부는 평소엔 서로 쌀쌀맞게 대하면서 이렇게 가끔 울음바다가 되는 우리를 보면서 웃었어요. 입국장 문 너머로 제가 사라질 때까지 마지막까지 돌아보고 계셨던 것 아빠였고요.


 그래서 전 아직도 그 원두를 생각합니다. 그 원두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아직 모르겠어요. 무서워서 못 물어봤어요. 잘 마시고 있는지 아낀다고 안 마셨는지, 안 마시고 있으면 너무 화가 날 것 같거든요. 그 커피를 그리워하다가 테스코에 갔을 때 왠지 맛있어 보이는 인스턴트커피가루를 사면서도 이게 형벌이 될 것이라는 건 몰랐어요. 다음날 아침에 그 커피를 마시고 으웩이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기 전까지는요. 그 커피가 아직 존나 많이 반이나 넘게 남았어요. 하지만 전 그 커피를 다 마실 작정이에요. 다시는 이런 바보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요. 그 똥커피를 다 마시면 근처에 유명한 로스터리에 가서 원두를 사 와서 내려마실 거예요. 드리퍼도 살 거예요. 그동안 왜 커피 드립 용품을 사는 것은 나에게 사치라고 생각했는지 과거의 멍청함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요. 지금 커피 내리는 장면을 생각하면서 제 앞에 그 커피를 마셨는데요. 여전히 똥커피예요. 이거 언제 다 마셔요?


 소장님이 영국 잘 가라고 써 주신 편지를 갖고 와서 비행기 안에서도 읽었어요. 비행기 안에서도 마스크를 눈썹까지 올려 썼어요. 눈물이 마스크안으로 다 쏟아졌어요. 소중한 원두 일부러 챙겨주셨는데 못 가져와서 정말 죄송해요. 그게 너무 미안해서 이제야 말해요. 하지만 한국에 돌아가면 그 커피 꼭 사서 올 거예요. 소장님 전 아침에 소장님 내린 커피의 향과 소장님이 있는 사무실에 가는 것이 저는 즐거웠어요. 런던에서 안소장님과 차팀장님을 생각합니다. 내가 본 제일 일 효율적으로 잘하는 사람, 귀찮은 거, 치근덕 대는 거 되게 싫어하고, 차가운 것 같은데 동물 얘기, 감동적인 동물 얘기에 카페에서도, 사무실에서도 뿌엥하고 우는 사람 안소장님을요. 밥은 아저씨처럼 빨리 먹지만 할머니처럼 때때로 맛있는 간식으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안소장님.

 반면에 장난을 칠 꿍꿍이가 있는 마음이 얼굴에 그대로 나타나는 장꾸, 여러 가지를 많이 참아 봐서 못난 내 모습도 참아준, 내가 욕을 할 때 제일 좋아하던 차팀장님도요. 밥은 할머니처럼 천천히 먹지만 맛있는 것을 잘 알아서 우리만 따로 불러 잘 사주시던 아저씨같이 호탕하게 웃는 사람 차팀장님을요.

 제가 언젠가 한국에 다시 가면 소장님이랑 또 같이 일하고 싶어요. 소장님이 돈 많이 버시고 크게 되시고 만수무강하시어 건축사사무소 여셔서, 아니 어떻게 제가 이런 월급을? 하는 그런 큰 월급을 주면서 저 일 시켜주세요. 그게 저의 소원입니다.


 이만 저의 원두를 못 가져온 건과 소장님에 대한 무한한 애정의 건에 대한 서신을 마치겠습니다.

소장님 생리통 없는 나날 보내세요~ 건강하세요~


 런던에서 춥팀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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