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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물킴 Feb 06. 2022

회사에는 왜 '괜찮은' 어른이 없을까?

어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정확한 시점과 경계를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스무 살이 되는 것 만으로는 분명히 부족할 테고. 취업을 하는 순간부터? 스스로 밥벌이를 하는 순간부터? 자취 및 독립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결혼을 하는 순간부터? 애를 낳는 순간부터?


성인이 되고, 괜찮은 어른의 존재와 뜻을 찾기 위한 여정은 끝이 없었다. 부모님으로부터, 선생님으로부터, 선배로부터, 책으로부터, TV와 영화로부터. 때로는 흡수하고, 때로는 거부하며 나를 다듬어 나가는 과정이었다.


왠지 어딘가에 있을법한 그 '괜찮은 어른'들을
회사에서 만나기는 참으로 쉽지 않았다.


1. 각기 다른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 속 개인이기에

한 마음 한 뜻으로 회사를 다니기란 쉽지 않다. '돈벌이'라는 지상 최대의 목표 아래 모인 사람들의 속마음 모두 제각기. 서로 다른 라이프 스타일, 가치관을 가졌기에 돈을 받고 일하는 그 책임과 의무만을 다한다면 '괜찮은' 사람 노릇까지는 그야말로 '+@'에 해당되는 영역이었다.


당신은 왜 나에게
 괜찮은 어른까지는 되어주지 못하냐고 따져 물을 수 없었다.


나를 포함해, 주변에는 월급값 하기에도 벅차고 허덕이는 사람들이 꽤 많았기 때문이다.  


2. 적절한 필터링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이도 생각도) 어렸을 땐 더 좋은 학벌, 더 많은 면접, 더 큰 회사를 들어가면 낫지 않을까 믿는 부분이 있었다. 그 과정이 주는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괜찮은' 인성까지는 필터링해줄 수는 없는 것이었다. 어쩌면 회사는 그 요소를 그리 우선순위로 생각하지 않는지도 모르지. 인성과 업무 효율, 인성과 퍼포먼스의 관계성에 대해 우리는 꽤 비관적인 사례를 자주 목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괜찮은 어른'을 만나는 것은
그야말로 운빨이란 말인가.


그 가설은 나를 속상하게 했다. 나는 뭘 뽑아서 당첨된 기억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괜찮을 어른을 만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긴 쉽지 않았다.


3. 괜찮은 어른은 이미 다 탈출했기 때문에


'똑똑하고 괜찮은 사람들은 이미 다 탈출했지,
여기 있겠냐?'


는 꽤 자조적인 회사원들의 깨달음은 언제나 통하는 한탄과 푸념이다. 결국 정의와 선은 시간이 오래 걸려도 승리한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나는, 오래 버틴 자(이를테면 임원과 고경력자)들이라면 인성이라는 덕목이 어느 정도는 갖춰진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는 가설이 있었다.


물론 이 가설이 처참히 무너지는 것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팀장이 되어 만난 또 다른 '어른의 세계'에서 나는 더한 욕심과 이기심, 젊은 세대를 짓밟는 무지와 배척을 굉장히 자주 접했기 때문이다. 권력은 인간에게 시스템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는 자유와 힘을 주었고, 권력을 유지하면서 이기적인 본성까지 잘 관리해낸 훌륭한 '인간상'을 찾는 것은 더욱 난이도 높은 미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 인간의 본성을 믿었다가 패망하는 집단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클리셰.


4. 제대로 된 시스템이 없기 때문에

괜찮은 어른을 만나기 위한 가설들이 번번이 오류 판정을 받으면서 나는 인간과 그 본성에 대해 믿음을 잃어갔다. 이번엔 그 본성을 적절히 관리하는 시스템을 믿어보기로 했다. 적절히 견제하고, 관리하고, 평가하는 시스템 아래 최고의 효율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때때로 '조직 관리'의 순기능을 마주하면서, 어쩌면 이것이 정답에 아주 근접한 가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 가설의 치명적인 약점은, 시스템은 직접 경험해보기 전엔 그것이 가진 장단점을 완전히 평가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결국 적절한 규모, 방식, 방법 등으로 조직을 잘 갖춰나가고 있는 회사를 찾을 수 있는 네트워크, 안목 등이 어느 정도는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회사를 선택할 때 CEO, 내가 일하게 될 조직 리더 등의 인터뷰를 찾아보는 일은 꽤 도움이 되기도 했다.


이는 어떤 가치관을 가치고 인생을 살고,
회사를 운영하는지 판단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아, 물론 일 잘하는 홍보팀이 있는 회사는 그것도 다 관리하지.
정말 이기기 힘든 싸움이라니까.)  


5. 애초에 '괜찮은 어른'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모성애, 부성애와 같은 무조건적인 인류애를 동반한 관계가 아니고서야, '괜찮은' 어른을 만난다는 게 가능하다는 가설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일도 잘하면서, 조직에게 인정받고, 위아래 옆으로 존경도 받고, 개인사까지 훌륭한. 그런 사람 어디 있다고 들은 것 같긴 한데, 왜 나는 만나기가 그렇게 힘들었지.


이게 말로만 듣던
그 유니콘이라는건가...?


죽을 때까지 배움에는 끝이 없고, 우리 인간은 실수를 반복하는 존재라면 꽤 '괜찮은 어른'이 되기 위해 노력할 뿐, 완성형이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가설은 차라리 현실적인 결론이었다.


6. 내가 '괜찮은 어른'이 아니기 때문에

조금 슬픈가. 하지만 꽤나 설득력 있는 가설이다. 내가 괜찮은 사람이 아닌데, 괜찮은 사람이 어디선가 짠하고 나타나 나를 구원해 줄 수는 없는 일이다. 괜찮은 어른이라고 바보는 아닐테니까. (철저한 자기 검열로 객관성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내가 바로 ESTJ.) 나이를 먹어가며 이 가설은 꽤나 힘을 받는 중이다.


세상엔 좋은 것, 나쁜 것이 함께 공존하고
어떤 선택들로 내 주변을 채울 것인지는 사소한 결정들로 좌우된다.


좋은 선택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내 주변은 좋은 사람들과 좋은 환경으로 채워져 있음을 실감하고 나니 이 가설은 더욱 내 안에서 존재감이 커져갔다. 피곤하게 남 탓, 거창하게 세상 탓까지 할 필요 없이, 나의 존재와 기치를 위해 애써야 한다는 만고의 진리와 맥락을 같이한다는 점에서도 마음에 드는 가설이었다.




아니, 그래서 괜찮은 어른이 정말 한 명도 없었냐고? 아니지. 돌이켜보면 많았다.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고 할 순 없지만, 순간순간 나의 성장과 깨달음에 도움을 준 어른들. 나를 리드해주고 있는 어른들은 지금도 주변에 적지 않다. 그 어른은 때론 나보다 한참 어린 사람이기도, 심지어는 사람이 아니기도 했다. '괜찮은 어른'을 발견할 수 있는 안목도 키워내야 하는 역량이었던 걸까.


아니, 그래서 나는 지금 괜찮은 어른이 되었냐고? 모르지. 지나간 실수와 욕심들을 떠올리면 자다가도 '아오' 소리가 절로 나며 얼굴이 화끈거린다. 꽤 괜찮은 어른이 된다는 거, 정말 어렵더라고. 10년 뒤쯤에는, 아니 죽기 전쯤에는 '나 꽤 괜찮았네' 만족할 수 있을까. 그런 어른이 진짜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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