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와 처음 같이 갔던 해외여행은 11년 전 보라카이였다.
열심히 이곳저곳을 뒤져봐도 안심하고 따라 할 만한 자유여행 정보를 찾기가 힘들었다. 고민 끝에 H와 나는 패키지여행을 신청했다. 우리 둘은 모두 바다를 좋아했다. H는 세부, 파타야, 괌 등 가까운 휴양지들을 이미 다녀온 뒤였지만, 나는 생전 처음 방문한 해외 휴양지가 보라카이였다. H와 만나기 시작한 지는 이제 겨우 3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함께 해외여행을 간다는 것이 조심스러운 마음이었다. 보라카이를 가는 여정은 멀고 험했다. 필리핀에 도착한 뒤, 작은 경비행기를 옮겨 타고 섬으로 들어갔다.
함께 패키지여행의 멤버가 된 타인들은 일본인 H에게 높은 관심을 보였다. 한국인 특유의 선을 넘는 질문들을 서슴지 않는 모습을 보고 나는 패키지여행 신청을 곧장 후회했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지극히 일본인다운 H는 애써 대화를 이어나가며 나에게 때때로 구조요청을 보내오곤 했었다.
보라카이 바다는 신비롭게 푸른빛을 띄고 있었다. 우기라 때때로 비가 쏟아져 내리기도 했지만 이내 분홍빛 노을이 지기도, 에메랄드빛 파도가 밀려오기도 했다. 기분 좋은 긴장감이 H와 나 사이에 돌고 있었다. 그 긴장감을 주고받는 장소가 보라카이라는 사실이 좋았다. 이국적인 장소에서 나는 해묵은 고민에 잠기곤 했다.
여기서 각자의 나라로 다시 돌아간 뒤,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우리에게 다음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그때도 우린 이 긴장감을 나눌 수 있을까?
보라카이에서 지내는 동안 프리 다이빙을 자주 즐겼다. 물이 맑아, 바쁘게 헤엄치고 있는 다리 아래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 듯 보였다. 수영을 곧 잘하던 H는 바다를 마음껏 누볐다. 나는 한가로우면서도 자유로운 몸짓의 H를 사랑했다. H는 항상 단단하고 흔들림 없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확고하면서도 여유로운 시선에 부러움을 느꼈다. 그것이 부모님이 물려주신 것이라면, 마땅히 금수저라 불려야 했다.
그에 반해, 나는 물 위로 올라가 첨벙 대는 것이 무서웠다. 웅크리고 주변을 살피는 것이 마음 편했다. 심해의 고요함이 차라리 좋았다. 해맑은 모습으로 물 위를 나서는 것이 자신 없었다. H는 나에게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H는 내 손을 잡고 함께 바닷속으로 들어와 헤엄쳤다. 그리고 부서지는 햇살을 향해 함께 올라가자고 손짓했다. 나는 뒤따라 갈 테니 먼저 올라가라고 했다. 수면 위를 향해 발을 내젓는 H의 뒷모습이 보였다.
눈이 부셨던 이유가
쏟아지는 햇빛 때문이었는지, 사랑스러운 H의 몸짓 때문이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수만 개의 물방울들이 그를 하늘로 올려주듯 뒤따랐다.
그로부터 11년이 흘렸고, 우리는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달콤한 미래를 함께 꿈꾸기엔 현실이 짓누르고 있었다. 함께하자는 약속은 굳건했지만, 그것이 반드시 영원할 것이라고는 믿지 않게 되었다. 잊을 수 없이 강렬했던 보라카이 노을과 바다의 색은 여전히 그대로일까. 그것만은 영원할 수 있을까.
우리가 다시 보라카이를 갈 수 있을까.
우리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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