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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시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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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우 Dec 01. 2022

로벨리아



유리창에 낀 성에를 문지르던 아침     


문풍지는 붙여놓았는지

땔감은 쌓아두었는지

네 안부가 궁금해졌다     


밀린 채무 독촉장을 들고서 재촉하듯

찾아온 한파 집행관의 방문에

적잖이 놀라진 않았는지    

 

외풍이 살갗을 파고드는 바위틈

로프를 감고 거꾸로 매달려

공중그네를 타는    

  

곡예사의

21인치 허리

풍성한 보랏빛 주름치마

새카만 암각화로 그려내었지   

  

로벨리아,

마음이 얼어붙는 거리는

눈길이 멀어지기 시작하는

눈썹, 바로 아래 낭떠러지 아닐까   

  

긴긴 겨울 자물쇠를 걸어 잠근 채

무문관 수행하는 네 바위집     


출입을 봉쇄하는 고드름 창살 너머

모든 생각이 죽어서

귀향하는 그 길 끝에서라도

     

동지 제일 긴 어둠을 휘저어

새알심(心)처럼 보시시 떠오르는 그리움

조각배 태워 다시 돌아와 줘     







          

11월 말, 도봉산 어느 암자에 핀 로벨리아 꽃



예고 없이 찾아든 한파가

"이제부터 겨울이야!" 선포합니다

북극 제트기류가 약해지면서 한파가 미끄럼 타듯 한반도로 내려온 아침


어떤 꽃의 안부가 걱정되었어요

열흘 전 도봉산 자락을 걷고 있었죠

등산이 아닌 그냥 어슬렁어슬렁 발길 닿는 대로

흰 구름이 걸린 어느 높다란 지점까지 올라가 보았습니다

물길이 흐르는 개울물을 끼고 있는 작은 암자 거기까지..


마당 입구로 들어서는데

키 낮은 돌담 아래 보라색 작은 풀꽃이 선명하게 피어있었어요

낙엽은 이미 지고

11월 말, 조금 쌀쌀한 날씨

고도가 있는 산자락에 꽃이라니!!


제비꽃인가?

생김새가 조금 달라 보였어요

돌덩이와 돌덩이가 맞물린 틈새

뿌리내려 먼저 핀 두 송이는 실오라기만 벗어두고

두 송이 꽃 어찌나 생글거리는지..


꽃을 자세히 보아요

허리가 엄청 날씬하죠

그 허리에 보라색 치마를 입혀서

공중그네를 타는 곡예사 같지 않나요?


물이 얼어붙는 기온은 0도

마음이 얼어붙는 온도는 무관심 0도

거리로 말한다면 눈길이 멀어지는 눈썹 아래 낭떠러지입니다

우리 시선이 때로는 절벽이 됩니다

거기 매달려서 살아날 방법이 없지요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싸늘한 시선,

한국 사람들은 모르는 남에게 인색합니다

화안시(和顔施)도 보시라는데 말이죠

처음 보는 동양인에게도 기꺼이 웃음을 내어주는

외국인들이 더 친근하게 느껴질 때 있지요

언어의 장벽을 떠나서요

모국어가 때로는 장벽이 됩니다


꽃은 지금쯤 시들었겠지,

남은 초록색 풀집은 어찌 살아가나?

이 한파에 무슨 대책이 있을라고..

출입문을 닫고 꽁꽁 숨어 지내는 수밖에


그 모습 상상하며

무문관 수행에 빗댑니다

한 생각이 일어나 뜬구름이 휘젓고 다닐지라도

어느새 맑게 열리는 파란 가을 하늘


너무 멀리

떠나지는 말아요

동지 제일 긴 어둠이 걷히면

태양이 되살아나듯

모든 생각이 죽은 다음에라도

팥죽 새알처럼 동동 새하얀 그리움 떠오른다면

다시 돌아와요

그 소망들이 봄의 기적을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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