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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시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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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우 Jun 01. 2023

압구정 장미



오월의 비바람에 시달렸더니

여름 목전에 다가선 태양이

올가미를 씌워서 그을린다

각오 단단히 해야만 버티는 계절    

 

율법의 십자가에 매단 손발이

초록색 페인트칠 대문 담장 너머

말라비틀어진 장미들을

따분한 표정으로 체념한다    

 

힐끔힐끔 쳐다보는 폐경기 절규를

물내음 묻은 바람은 이별 통보

비참하게 떨어질 일만 남았다     


건너편 재건축 승인 아파트는 고공행진

집주인들이 떠나고

국산 승용차들만 바글거리는

이편 골목은 조용하다     


금싸라기 땅에 반 평 화단

비싼 세 들어 사는 장미도

고단한 눈치를 보긴 마찬가지

창문을 닫은 사람들은 말이 없고     


기승전결 구조 골목길은 끝나지 않는다

징징거리는 어린아이가 지나가면서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를 내주면 좋으련만


한숨마저 삼키고 삼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블랙홀     

만 원짜리 보세옷가게에서 한 여자가 걸어 나온다


이른 더위를 기다려온 여자의 팔다리는

살색 과다노출

부자 동네가 영 촌스럽다



ⓒ 2023. (남연우) all rights reserved.     


지난해 가을장미

오월의 비바람이 지나갑니다

요란한 바람도 없이 차분하게 지나갔습니다

물기가 묻은 바람이 더위를 부채질하네요

집 앞 울타리에서 장맛비를 기다리는 장미들은

슬퍼합니다

피었나 싶게 축 늘어지는 뱃살의 주름 같은 시듦,

체념의 표정을 짓습니다

압구정 장미라고 다르진 않습니다

노른자 위에 한 뼘 차지하고 피었으나 늙어가긴 마찬가지


그 골목은 따분한 여름이 도착했습니다

그늘을 찾아서 편식하는 발걸음이 걸어가는 내내

어린아이를 만나지 못해서일까요

시작도 끝도 없이 뚝 끊긴 이야기 한토막

읽는 느낌이 듭니다

난독증이 도지나 봅니다

(무슨 소리 하는지..)


여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팔다리를 드러내고

여자들만 더위를 더 타는 걸까요

벌써 그러면 삼복더위에는 어쩌려구..

음소거 골목길을 걸으며

(지나가는 개도 없음)

시들어가는 장미만 눈에 들어옵니다


딱 한군데

진짜 만 원짜리 보세옷가게가 있더군요

(경기도에는 없는, 안 보이는)

(여기가 압구정 맞나?)

버스를 기다리며 뒤편 현대아파트를 잠시 쳐다봅니다

국산차가 많더라고요

낡은 베란다 샷시 너머 빨래들이 걸려있고

온통 낡은 거리에 조금 세련돼 보이는 사람들

서울 한복판 촌구석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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