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살 아이는 엄마와 소크라테스식 대화를 무척이나 즐긴다. 소크라테스식 질문을 하는 거리의 선생은 아이다. 엄마는 거리의 수강생.
최근 읽은 에이모 토울스의 신간 <링컨 하이웨이>에는 에밋, 빌리 형제가 나온다. 에밋은 우리 나이로 스무 살 정도, 빌리는 열 살 정도. 에밋은 과실치사로 소년원에서 갔다가 조기 출소한다. 형제의 엄마는 8년 전 집을 나가고, 아빠는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아빠가 남긴 농장은 빚으로 압류된 상태다. 그들은 새 출발과 함께 엄마를 찾아 링컨 하이웨이를 타고 캘리포니아로 떠난다. 하지만, 인생이 계획대로 될 리 없지 않은가. 더욱이 젊은이의 인생이라면. 에밋은 죽을 위기에 쳐하게 될 때마다 동생 빌리를 생각한다.
'내가 없으면 빌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 힘으로 살아낸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베르톨트 브레히트,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내가 없으면 아이는 어떻게 될 것인가.'
아이에겐 내가 필요하다.
정신이 번뜩 들었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해야 한다.
무인도라는 곳은, 고립된 곳. 무의 상태다. 그곳엔 한 가지를 가져간다는 건, 소중하고 아낀다는 의미다. 내겐 커피였고, 아이에겐 엄마였던 그것.
커피는 나를 소중하게 생각할까? 아낄까? 나는 커피를 소중하고 아끼는가?
날짜를 세다가 잊어버렸는데 커피의 카페인 부작용으로 왼쪽 눈밑이 심하게 떨린 지 꽤 되었다. 마그네슘 2알로는 부족한지 아직도 몸은 디폴트 값을 찾지 못했다. 커피의 양을 정말 확 줄였다. 눈물을 머금은 정도가 아니라 커피를 못 마셔 눈물이 났다. 드립 커피는 아예(?) 끊고, 에스프레소 2잔으로 연명 중이다.
사실, 아주 잠시 눈 밑 떨림이 멎어서 너무 기쁜 나머지 드립 커피를 내려 마셨다. 오랜만에 드립 커피의 향과 맛에 잔뜩 취해 황홀경에 빠졌다. 거울을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다시, 눈 밑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커피를 소중히 생각하는데, 나는 커피를 아끼는데 순간 커피가 나를 버린 느낌에 절망감이 몰려왔다. 그러다 퍼뜩 깨달았다. 커피는 내 몸을 보호하고 있었다는 것을. 커피는 내가 필요했다는 것을. 어쩌면 커피의 신이 내 몸에 전한 메시지였을지도.
이제 나는 정신을 차리고, 삶을 살아간다. 마그네슘 부족으로 커피와 멀어져서는 안 되겠기에. 내 몸을 아껴야겠기에. 커피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