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은영 쌤이 그랬어요.
내 사전에 빚은 없을 줄 알았다. 물론 집과 관련된 대출은 제외하고. 없으면 안 쓰고 말지 빚을 내서 욕구를 채우며 사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도 사업을 하면서 대출에 대한 상의를 한 적이 없었기에 소규모로 그럭저럭 유지되는 것에 감사해하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덜컥 일이 터져버린 것이다. 울먹이는 그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빚은 대략 몇 억 원… 순간 든 생각은 일단 사람부터 살리고 보자, 그동안 혼자서 말도 못 하고 얼마나 괴로웠을까, 였다. 이 일이 있기 몇 달 전에 그가 내 명의로 받은 대출은 일단 차치하고서 그와 관련된 일을 수습하는데 힘썼다.
그렇게 여차저차 시간이 흐르고 개인회생 완주를 반년 앞둔 시점에 그는 또 주저앉아버렸고, 이후 차차 합의금이다 뭐다 해서 월급을 제하고 생활비를 주거나, 나아가 나에게 돈이나 대출을 요구했다. 나는 정말 속이 썩어 들어가는 것만 같았지만 죽겠다는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다시 그 소용돌이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이후 또 여차저차하여 그에게 1억이 넘는 사채 빚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제야 이는 단순히 사업실패에 대한 좌절로 비롯된 문제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는 나 몰래 계속 빚을 지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더군다나 합의금으로 내게 받아간 돈들 또한 다른 일에 쓰였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는 또렷한 설명은 기피하면서도, 첫 번째 개인회생에 포함되지 않았던 돈이 계속 불어났다는 식으로 변명했다. 그럼 왜 나에게 모든 빚이 포함된 것이 아니라고 미리 말하지 않았느냐 물었지만, 원활한 대화가 잘 안 됐다. 이미 그의 멘탈은 거의 나간 상태였다.
나도 그즈음에는 모든 의욕을 잃어 캐묻고 따지고 할 기운조차 없었다. 회생에 실패한 기존 빚에다가 사채까지… 이건 로또 1등이 아니고서야 답이 없구나, 체념하게 되었다.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간 것만 같은 시간이었다. 이때 ‘오은영의 결혼지옥’이라는 프로그램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내 귓가에 꽂혔다.
“남편 분, 상의 없는 빚도 가정폭력입니다!”
문득 티브이를 보니, 나처럼 혼이 다 빠져나간 아내가 남편의 끝도 없는 빚에 지쳐 무기력하게 앉아 있었다. 남편은 빚 문제로 그녀를 지속적으로 속이고 있었고, 그녀의 상식적인 요구는 번번이 묵살되었는데, 그녀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출처모를 상의 없는 빚들로 인해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 모습에서 정신이 번뜩 차려졌다. 내가 지금 겪고 있는 것이 바로 가정폭력이구나. 세상 가장 온화한 남편은 빚이란 종목으로 나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중이구나. 그렇다면 나는 이 폭력에서 빠져나가야겠다 하는 의지가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나를 계속 그곳에 둔다는 건 방치이며, 이는 자학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이후로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내 안의 오은영 선생님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상의 없는 빚도 가정폭력입니다.”
이 말을 떠올리면 언제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결국은 내가 내 스스로를 도와야 하는 것이었다. 내가 떠난 지금의 그도, 나도,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자신을 돕기로 결정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타인도 피해자를 도울 수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