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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작가 Oct 28. 2022

시골에서도 적당한 거리를
두고 싶은데요

시골 사회에서의 관계, 그리고 텃세에 관하여 

  시골 하면 생각나는 이미지들을 떠올려보자. 푸근하고, 친절하고, 정이 많을 것 같다. 울타리는 있지만, 담은 없어서 언제든 이웃들과 가족같이 지낼 것 같고 이름하여 공동체처럼 한마음 한뜻으로 마을이 굴러갈 것 같다. 무지한 도시인에게 무한한 친절을 베풀 것 같다. 만인의 할머니와 만인의 할아버지가 되어 우리의 어깨를 감싸줄 것만 같다. 따듯한 품과 사람의 체온이 필요할 때, 진득하고 따스한 온기를 나눠줄 것 같다. 시골은 이런 이미지다. 도시와 반대되어 계산적이고 무정한 콘크리트 건축물 사이보다 사람 사는 곳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시골인들은 배려와 베풂을 입맛대로 뽑아주는 자판기가 아니다. 도시에서도 사람이 가장 힘들었지만 시골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가장 힘들다. 결국 도시도, 시골도 사람이 사는 곳이니까.



  귀촌과 귀농의 열풍이 한동안 불어 많은 사람들이 시골로 회귀했다. 모두들 각자 저마다의 소망과 바람을 품고 산과 나무, 그리고 마을 속으로 들어갔지만 그것이 녹록지 않음을 느꼈다. 먹고사는 문제와 더불어 가장 골치 아픈 것은 현지인들과의 관계였다고 많은 귀농/귀촌인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각종 뉴스와 다큐멘터리, 시사 프로그램에서 이를 이슈화 시켰고 우리네의 외갓집과 티비 예능프로들에 절여져 있던 도시인들이 품은 시골에 대한 환상을 무참히 박살 내주었다. 이름하여 시골 텃세라고 불리며 갓 시골에 발을 내딛은 신참 귀촌인들에게 해결해야 할 가장 큰 과제를 던져 주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마을은 티비에서 보던 심각한 텃세는 없었다. 은근슬쩍 못살게 굴고, 또는 대놓고 못살게 굴면서 물리적, 정신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히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시골 텃세는 그저 언론에서 보도된 자극적이고 일부에 호도된 사실이라고 여기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충격적이게도 우리 집은 이사를 한 첫날, 잔치를 열었는데 그것은 일종의 신고식이었다. 고기를 삶고, 각종 음식들을 마련해 이사한 당일 모든 마을 사람들을 초대해서 대접했다. 우리는 마을에 처음으로 입성한 귀촌인이었고, 가이드라인이 딱히 없었기 때문에 몇몇 마을 사람들의 조언을 얻어 준비한 행사였다. 잘 부탁한다고, 부디 얼굴 붉히는 일 없이 잘 지내보자고 하는 인사였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듯, 시골에 가면 시골의 인사법에 맞게 인사를 해야 했다.



  결국 마을이라는 것은 여러 집이 모여서 생긴 것이다. 왜 여러 집이 모였냐에 대한 물음은 아주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고 대게 그 물음에 대한 답은 결혼과 출산으로 귀결된다. 결혼과 출산을 통해 구성원이 늘어나 분가를 하고, 그렇게 분가한 집이 모여 살면서 마을이 됐다. 결혼과 출산으로 이어진 만큼 마을 구성원은 대부분 같은 피, 같은 성씨를 가지고 있었고 우리는 이것을 집성촌이라 부르기로 했다. 우리 마을은 '황'씨 집성촌이었고 우리 같은 외부인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어르신들이 황 씨 성을 가졌다. 집성촌이라는 것은 피로 이어진 만큼 그 끈끈함이 대단해서 같은 성씨 이외의 사람이 비집고 들어가기가 고되다. 우리는 이런 집성촌에 틈을 벌리고 안착해야 했다.   

  


  나는 처음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파트를 이사 다니며 옆집, 윗집 정도에 떡을 돌려 보기는 했어도 잔치를 여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안 그래도 모든 것이 혼잡스럽고 정신이 없는 이삿날이 세 배는 바쁘고 고난스러웠다. 마을의 온갖 사람들이 새집을 들락날락 거리며 구경을 하고 음식을 먹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이 행사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즐겼고 우리의 인사는 그런대로 잘 먹혔던 것 같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번잡스러운 것을 딱 싫어하고 사람에게 큰 노력을 하지 않는 엄마와 아빠가 이 행사를 주최한 이유는 시골 텃세의 악명을 익히 알고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우리가 텃세를 당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어쩌면 경우에 따라서는 과하다고 느껴질 이사 잔치 때문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가끔 엄마와 아빠를 통해서 듣는 마을 사람들과의 이야기나, 내가 직접 본 우리 마을의 모습은 자칫 잘못했다가는 텃세가 있을 수도 있었겠다 싶은 순간들을 자아냈다. 그래서 섣불리 시골 텃세는 모두 과장이다!라고 말하지 못하겠다. 



  어느 시골 마을이나 마을의 경계가 정해져 있다. 지금은 지도가 워낙 발달해서 방구석 안에서도 우리 마을의 범위를 자세하게 볼 수 있지만 과거에는 그러지 못했다. 마을의 자세한 지도를 만든다는 것은 아주 귀찮고 쓸모가 없는 일이라 보통은 지형지물을 이용해 마을의 경계를 합의한다. 우리 마을의 경계는 우리 집 옆으로 뻗은 야트막한 산줄기와 그곳에 흐르는 시냇물, 그리고 그 위에 지어진 작은 다리였다. 그러니까 우리 집은 마을 경계에 바로 걸쳐 있는 것이다. 다행히 마을 사람들은 우리는 마을의 바운더리 안쪽에 있는 사람으로 인식했고 마을 주민으로 인정받았다. 우리의 주소가 마을에 속해있는지는 크게 중요치 않다. 오래전부터 내려져온 마을의 경계를 기준으로 안팎에 있냐가 중요했다. 



  마을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는 우리 집의 위치는 사실 지극히 의도적인 것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자연인처럼 깊은 산골짜기에 동떨어져 사는 것은 원치 않았다. 마을 주민이 되어 마을의 최소한의 인프라와 인적 교류를 하고 싶어 했지만 진득하고 가족 같은 마을 구성원이 진심으로 되고 싶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싶어 했다. 그래서 마을 중심가와 다소 떨어진 곳에 집터를 골랐고 집터의 위치로 엄마와 아빠는 당신들의 의견을 전달했다. 눈에 띄지 않으면 크게 생각이 나지 않을 것이라는 이 수법은 생각보다 효과적이었다. 물론 이 수법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 적도 많았지만 이 위치가 아니었다면 우리 가족은 더 깊숙하게 마을 일에 관여해야 했을 것이다. 



  도시에 차고 넘치는 사람이 싫어서 시골을 택한 엄마와 아빠였기에 시골에서마저 사람에 지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것은 아주 딱 질색이었다. 하지만 사람과의 관계를 맺지 않고 혼자서만 살아간다는 것은 자립이 아니라 고립임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적당히 거리를 두고 싶었다. 이사 잔치를 열어 마을 구성원으로 무리 없이 안착할 수 있었지만 마을일에 다소 무관심하고 냉소적으로 대하며 필수적인 행사를 제외하고는 잘 참여하지 않음으로 우리는 우리의 입장을 전달했다. 이장님을 비롯한 마을 일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분들에게는 그것이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지만 그 적당함은 늘 어려운 법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적당함이다. 처음에는 꽤 고전을 면치 못했다. 우리가 잔치를 열기도 했고 우리의 입장을 명확하게 전달하지 못했을 때, 정말 별의별 일들이 있었다. 아빠를 마을 청년회에 영입하려는 각고의 노력이 있었다. 그런 친목이 싫어 회사도 때려친 아빠에게 그것은 거의 혐오 수준으로 받아들여졌다. 오만가지 표현을 써서 거절 의사를 밝혔고 나중에는 대놓고 싫다고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아빠의 도시에서의 직업을 듣고는 그것에 관련된 부탁이 있었다. 처음에는 아빠도 아주 단순한 부탁이어서 들어줬지만 갈수록 무리한 부탁을 했다. 전문가가 왜 일을 해주고 돈을 받는지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어르신들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을회관에서 각종 잔치나 술자리가 있으면 늘 불렀다. 최대한 참석하지 않으려 애썼고, 참석해도 술은 최소한 만큼만, 그리고 밥만 먹고 빠르게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귀촌 생활 초기에 우리를 괴롭게 했던 것이 바로 열고 닫는 문이었다. 시골은 집을 비우지 않는 이상 일상에서는 문을 잘 잠그지 않는다. 우리 집도 마찬가지다. 주변에 우리밖에 없고 딱히 문을 잠글 이유가 없어서 열어놓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화근이었다. 어르신들이 가끔씩 불쑥불쑥 집 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부분 부탁이나 요청을 하러 온 것이었다. 우리는 처음에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렇게 통보도 없이, 심지어 우리가 점심을 먹고 있을 때 개의치 않고 남의 집 문을 열 수가 있다니. 이게 바로 시골 문화? 시골의 정? 이런 건가 했다. 엄마와 아빠는 처음에는 표정을 잘 추스르고 에둘러 말해 어르신들을 돌려보냈지만 나중에는 결국 통보했다. 제발 이렇게 불쑥불쑥 문을 열고 찾아오시지 말아 달라고. 문을 두드리거나 미리 연락을 주시라고. 



  이것들 말고도 도시였다면 상상할 수 없을 일들이 많았다. 모두가 자는 새벽에 뒷문을 두드려서 모종을 얻을 수 있냐고 물어보는 사람. 말도 없이 마당에 경운기를 대고 밭일을 하는 사람. 남의 밭에서 나물을 따고 작물을 채취하는 사람. 마을 회비의 과도한 납부를 종용하는 사람. 정겨운 시골사람들의 귀여운 실수라고 하기에는 무례에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그럴 때일수록 주춤하지 않고 더욱 단호하고 당당하게 거절 의사를 밝히고 거리를 두었다. 행복해지려고 온 시골인데 그런 것 때문에 움츠러들면 안 되니까.



  이런 사람들만 있으면 도대체 시골은 어떤 곳인가 싶겠지만 좋은 분들도 넘쳐난다. 우리의 환상 속에 존재하는 시골 사람의 이미지를 빼다 박은 사람들이다. 집에서 한 반찬이나 기른 농작물을 우리에게 나눠주고, 농사 초보인 우리를 진심으로 걱정해서 조언과 배움을 주는 어르신도 많았다. 우리의 적당한 거리감을 눈치채고 배려를 해주신 어르신들도 역시 있었다. 우리와 맞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당연하게도 우리와 잘 맞는 사람도 있었던 것이다. 사람 사는 것은 다 똑같으니까.  



  반대로 우리 집이 무례하고 예의 없다고 느낄 수 있는데 우리는 마을 어르신들을 마주치면 항상 인사하고 웃었다. 공식적인 마을행사에는 참여했고 친목이 아니라 노동력과 일손이 필요하면 가서 손을 보탰다.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뿐이지 그 관계를 파괴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냥 가볍게 인사 주고받으며 좋은 분들과는 그보다 살짝 더 친밀한 관계를 맺을 뿐이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도 어느 정도 정립이 되었다. 우리와 맞지 않는 분들과는 딱히 그 관계를 개선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와 맞는 분들과 소소한 관계를 이어 나갔다. 누군가는 우리 집이 매정하다고 할 수 있다. 마을에 소속된 구성원으로 그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고. 시골에 왔으면 시골의 문화에 적응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고. 하지만 우리 집은 마을이 그리워서 귀촌한 것이 아니다. 사람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산과 나무 속에서 농사를 짓고 싶어서 내려온 것이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사람이 싫어서 내려온 시골에서도 결국 사람 때문에 머리 아플 일이 생긴다는 것이. 결국 사람으로부터오는 도시에서의 고충이 따로 있었고, 시골에서의 고충이 따로 있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가족 같고, 정이 넘친다는 것은 우리도 그만한 성의를 보여달라는 것이다. 가족처럼 집에 드나들 수 있고, 부탁도 척척 들어줘야 하고, 화내지 말아야 한다. 가족은 그래야하니까. 하지만 이상하지. 가족 간에도 이런 행동을 하면 그 관계에 금이 가기 마련인데. 시골에서 엄마와 아빠가 가장 힘들어 했던 것은 이런 부분이었다. 폭우도, 폭설도, 끝없는 가뭄도, 고된 농사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엄마도, 아빠도, 나도 그리고 마을 사람들도 사람이니까 서로의 가치관과 문화가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 어느쪽도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싶다. 하지만 우리는 늘 시골에서도 적당한 거리를 두고 싶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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