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멀리 가보고 싶어

거리 & 방향_J

by JMJ

나는 걸음이 꽤 빠른 편이다. 동네 골프연습장까지 빨리 걸으면 20여분쯤 걸린다. 목적지가 뚜렷하면 자연스레 속도가 붙는다.


뭐가 될지 아직 알 순 없지만, 2025년이 내게 줄 선물이 궁금하다. 돌아보면 한 해에 꼭 하나쯤은 선물 같은 일이 있었던 것 같으니까. 아이처럼 순수하게 기대하게 된다. K가 좋아하는 이문세 노래 제목처럼 ‘알 수 없는 인생’이니까 일단 기대하고 본다. 뭐, 올해가 다 가도록 선물이 없으면 내년에 다시 기대해 보면 된다. 난 언제나 미지의 희망을 사랑한다. 그래서 이문세에 이어 임재범을 듣는다. 임재범‘비상’. “그렇게 많은 걸 잃었지만 후회는 없어. 그래서 더 멀리 갈 수 있다면~” 캬, 언제 들어도 멋진 가사 아닌가. 올해도 후회 없이 멀리 가보고 싶다.


사실, 멀리 가보고 싶은 마음은 나이를 먹을수록 더 커지는 것 같다. 돌아보면 30대까지만 해도 나는 늘 빠르고 정확하게 목표점에 도달하려 애썼다. 그러려고 일단 방향 설정부터 분명히 했었고. 으레 “인생은 속도보다 방향”이라고들 하지만 그동안 내게 ‘방향’은 곧 ‘지름길’을 알려줬다. 가고자 하는 방향이 확실하면 보다 빨리 갈 수 있었다. 확실한 방향설정이 전제되면 가속이 수월해지는 셈이었다. 그런데 40대로 들어서면서 차츰 달라졌다. 빨리 안 가도, 정확히 안 가도, 그저 멀리 가보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일단 멀리 가보면 미처 몰랐던 걸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됐다. 그래서 다니던 회사를 나와 이렇게 새로이 방황(?)하고 있는 걸지도. 그래도 덕분에 노랫말처럼 ‘힘겨웠던 방황이 이 세상 견뎌낼 힘이 돼 줄 것’이라고 믿는 배짱도 생겼다.



연습장에서 샷을 하면 시스템에 비거리와 구질이 표시된다. 비거리는 그야말로 볼이 날아가는 거리, 구질은 볼이 날아가는 방향이다. “나이스 샷”이나 “엑설런트” 평가를 얻으며 AI의 박수를 받으려면 일단 구질이 좋아야 된다. 페어웨이에 안착시키는 샷의 정확도가 필수적이다. 아무리 멀리 쳐도 페어웨이에서 많이 벗어나면 칭찬받지 못한다. 가급적 똑바로 치라는 건데, 실제 필드에서도 페어웨이로 티 샷을 보내야 다음 샷을 수월하게 이어갈 수 있고 이는 곧 점수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골프를 잘하려면 롱 게임만큼이나 쇼트 게임이나 퍼팅 게임 연습을 많이 해야 한다는 조언도 어쨌거나 홀 안에 볼이 들어가는 정확도가 점수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연습장 AI에게서라도 “나이스 샷”이나 “엑설런트” 같은 칭찬을 듣고 의욕을 충전하고픈 나는 처음에 구질이 가장 신경 쓰였다. ‘스트레이트’ 구질로 나와야 안심됐고, 간혹 비거리가 꽤 잘 나와도 ‘슬라이스’ 구질로 표시되면 기분이 별로였다. 보통은 공이 오른쪽으로 빠지는 ‘슬라이스’가 되면 ‘오비’가 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오비는 ‘아웃 오브 바운즈’(Out of Bounds)의 줄임말로 코스 내에서 플레이가 불가능한 구역으로 볼이 빠지는 걸 말한다. 그러면 페널티를 받고 최초 샷을 했던 곳에서 다시 플레이를 이어가야 한다. 쉽게 말해서 공이 영 엉뚱한 방향으로 가면 벌점을 받는 거다. 아무리 멀리 쳐도 오비면 소용없다. 단순히 생각하면 골프는 결국 방향이 중요하다 싶었다. 그래서 나는 스트레이트가 좋았다. 연습장 3개월 차, 기계에 따르면 나는 대체로 스트레이트 구질을 구현하고 있다.


묘한 건, 일단 골프가 어떤 건지 대충이라도 알 것 같으니까 구질보다는 비거리에 점점 욕심이 난다는 거다. 아직 하프 스윙 단계지만 지난주에 드라이버로 103미터를 날렸다. 지금껏 최고 기록이다. 이후로는 60~70미터쯤 곧게 쳐서 아무리 “나이스 샷”, “엑설런트” 박수를 받아도 감흥이 없어졌다. 무조건 더 멀리 보내고 싶다. 아시겠지만, 경험이 일천하다. 아직 필드에서 내기 게임을 안 해봐서 그런 걸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심정으로는 점수를 차치하고서라도 비거리 기록을 계속 경신하고 싶을 것 같다. 정확한 방향에 집착해서 짧게 짧게 샷 하는 거……왠지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나? 지나치게 목표점에만 구속되면 정작 장타의 쾌감을 잃고 말 것 같다. 물론 내가 멀리 칠 수 있을 거란 보장도 없다는 것, 기껏해야 취미 골퍼니까 할 수 있는 말이란 걸 안다. 하지만 그렇기에 페어웨이 안착률을 신경 쓰기 전에 그저 신나게, 가능한 멀리 골프볼을 날려보고 싶다. 가끔은 한 큐에 ‘홀인원’을 하는 꿈같은 꿈을 볼에 실어서 말이다. 오, 비거리와 구질 모두 탁월한 꿈의 레벨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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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에는 피터팬이나 웬디처럼 밤하늘을 나는 공상에 빠질 때가 있었다. 마치 새처럼 말이다.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는 격언을 가슴 한편에 주입시킨 이야기, ‘갈매기의 꿈’을 사랑했다. 리처드 바크가 쓴 그 책을 어른이 되어서 다시 읽었다. 위대한 갈매기 ‘조나단’의 꿈은 궁극적으로 ‘멀리 있는 것까지 볼 수 있는 삶’이었다. “눈이 보여주는 것은 다 한계가 있을 뿐”이라고 했다. ‘멀리’를 꿈꾸지 않으면 지금 보는 것만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산다. 나는 멀리 있어서 지금 미처 알지 못하고 있는 것들을 알아가고 싶다. 조나단이 꿈을 꾸며 비상했듯이 나도 꿈을 깨지 않고 멀리 가보고 싶다. 이제 내게 멀리 가는 꿈은 방향을 잡는 일 이상이다. 목표를 향해 정확하게 가는 일을 넘어 스스로에게 자유를 주고 싶다. 나를 풀어주고 먼 여정을 떠나게 하고 싶다. 꼭 골프 비거리가 낭만적으로 탁월하지 않더라도, 나의 세계는 더 낭만적이었으면 좋겠다. 이제 인생에서라면 속도나 방향보다 거리에 더 탐닉하고 싶다. 더 먼 길을 떠나고 더 많은 걸 경험하고 비로소 더 알게 되는 삶을 갈망한다.


기계가 연습 종료 10초 전임을 알린다. 오늘 마지막 볼. 최대한 집중해서 최대한 멀리 치기로 결심한다. 준비, 얍~! 오예, 스트레이트 구질로 95미터를 날렸다. “나이스 샷” 박수가 나온다. 이 정도면 근래 기록 중 꽤 괜찮은 성적이다. 멀리, 곧게 잘 쳤다. 하체를 많이 돌리고 볼을 하늘 위로 보내듯 치면 멀리 갈 수 있다고 배웠다. K가 좋아하는 이문세 노래는 나 역시 점점 더 좋아진다. 살아갈수록 ‘알 수 없는 인생’이라는 생각이 든다. 장담할 순 없지만, 아직도 많은 날이 남았다. 돌아서 다시 오더라도 일단 멀리 가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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