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 장 > 취업의 문 앞에서 방황
몇 주 동안 밖에 나가지 않았다. 아무 약속도 잡고 싶지 않았다. 은둔생활에 익숙해질 때쯤 고등학교 친구가 카톡을 보냈다. 집 앞이라고 얼굴 좀 보자고 했다.
“연서야~너 살이 왜 이렇게 쪘냐?”
도착하자마자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붙어있었던 친구였다. 우리 사이에는 벽이 없었다. 그래도 보자마자 살쪘다고 핀잔을 주다니. 안그래도 맞는 옷을 찾기가 힘들었다. 살이 찌거나 빠져도 일정 범위를 넘지 않는 체질이었기 때문에 친구의 말은 더 충격이었다. 돌아와서 몸무게를 재니 평소보다 10kg이 늘어 있었다. 고3 때보다도 7kg이 더 나가는 몸무게였다.
냉장고를 파먹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삼시세끼만 먹고 군것질을 하지 않으려고 해도 머릿속에서 자꾸 뭘 먹자는 말이 들렸다. 밥을 먹고도 ‘빵을 구워서 토스트를 해 먹자, 잼을 듬뿍 바르면 맛있겠다, 마트에서 초콜릿 잼을 사 와서 그것도 발라먹자.’ 라는 말이 들렸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계속 생각났다. 그렇게 토스트를 먹고 나면 아이스크림도 먹자는 말이 들렸다. 악순환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일단 집 밖으로 몸을 내보내야 했다. 그때 떠오른 단어가 있었다. 버스 창문으로 보았던 ‘복싱’이라는 두 글자가.
“안녕하세요, 상담받고 싶어서 왔는데요.”
복싱장에선 '띵~'하는 벨소리가 주기적으로 들렸다. 줄넘기를 하는 사람, 샌드백을 치는 사람이 줄지어 있었다. 작은 공간이었지만 모두 어느 한 곳에서 흠뻑 젖도록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주변에 학교가 많다 보니 초등학생들도 있었다. 살벌한 곳일 줄 알았는데 학생들이 있으니 마음이 놓였다.
“허허, 어서 와요, 이쪽에 앉아요”
관장님은 단단해 보이는 몸을 가지고 있었고 웃음이 많았다. 모든 문장이 ‘허허’로 시작했다.
“허허, 왜 복싱을 배우고 싶어요?”
“살이 너무 쪄서요. 다이어트도 될까요?”
“그럼, 당연하죠, 살 빼려고 온 초등학생도 있고, 직장인도 있어요.”
“그렇군요, 회비는 얼마예요?”
“3개월에 10만 원이고 운동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아요. 아무 때나 와서 하면 돼요. 레슨은 3회 20분이고, 끝나면 혼자 연습하면 돼요. 저녁에는 단체 훈련도 하니까, 그때와도 되고.”
“알겠습니다. 생각해볼게요.”
관장님은 여자 탈의실과 샤워실, 그리고 곳곳에 있는 운동기구를 소개해주셨다. 입구 왼쪽에는 스파링 연습장도 있었다. 초등학생들이 헤드기어를 끼고 스파링을 하고 있었다. “어린 나인데도 스파링을 하는 건가요?” 라고 물어보니, 초등부 대회에 참가하는 학생들이라고 했다. 초등학생 두 명이 서로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긴장감이 느껴졌다.
돌아와서 생각했다. 복싱하러 다니면 좋은 점과 나쁜 점이 무엇일까. 좋은 점은 일단 밖에 나가니 움직이게 된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사람도 만나게 되고 집중력과 정신력도 기를 수 있을 것이다.
단점은 현재의 상태에서 10만 원이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었다. 몇일 간 고민을 하던 차에 대학 때 아르바이트를 했던 곳에서 PPT 교안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이 왔다. 프리랜서처럼 잠깐 도와달라는 거였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바로 알겠다고 하고, 일을 했다. 그리고 복싱을 등록했다.
‘첫 3개월은 줄넘기만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은 기우였다. 첫날부터 스트랩을 손에 감는 법을 배웠다. 관장님은 아직 글러브를 낄 단계는 아니지만 스트랩을 감고 펀치를 해보라고 했다. 손을 11자로 만드는 것이 기본자세였다. 무릎은 낮추고 한쪽 팔이 나가면 무조건 다른 팔은 기본자세로 돌아가야 했다. ‘잽, 스트라이크, 잽잽, 스트라이크, 잽, 스트라이크’가 가장 먼저 익힌 콤비네이션이었다.
복싱은 힘들었다. 시작한지 1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팔이 빠지는 것 같았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관장님은 훈련을 멈추지 않았다.
“이것 밖에 안 돼? 한 번 더 해, 한 번 더. 그거 가지고 되겠어?”
정신이 혼미했다. 잽인지 스트라이크인지 소리를 듣고 맞는 동작을 취해야 하니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했다. 잠시라도 딴생각을 하면 목표 지점을 맞출 수가 없었다. 펀치 훈련이 끝나면 수련생들 모두 모여 복근 운동을 했다. 옷을 짜면 물이 떨어질 정도였다. 단체훈련까지 마치고 샤워를 하니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들었다. ‘샤워가 이렇게 개운한 것이었나.’ 거울을 보니 벌써 얼굴이 핼쑥해보인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관장님께 인사를 드렸다.
“내일 올게요, 관장님~”
“쉬엄쉬엄해. 일주일에 3번만 와.”
“네~”
몸을 움직이니 새로운 활력을 찾은 기분이었다. 돌아와서 이력서를 업데이트했고,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아 지원도 했다. 앞으로의 진로 방향도 다시 고민했다. 그러면서 오늘 배운 복싱 자세들을 떠올렸다. 거울을 보고 잽과 스트라이크를 연습했다. 빨리 도장에 다시 가고 싶었다.
복싱은 자신과 싸우는 운동이다. 샌드백 하나만 있으면 몇 시간이고 운동할 수 있다. 5개월 동안 잽과 스트라이크, 어퍼컷, 몸을 양옆으로 흔드는 위빙과 다양한 콤비네이션 스킬을 배웠다. 주 3일만 오라고 하셨지만 재밌어서 매일갔다. 레슨이 없을 땐 혼자 1시간이고 2시간이고 샌드백을 쳤다. 몸무게가 급격하게 줄진 않았다. 하지만 단단해졌다.
“연서, 이제 글러브도 사고, 마우스피스도 사. 헤드기어는 여기 있는 거 쓰고.”
“네? 전 그냥 다이어트하러 온 건데요?”
“허허, 대회에 한 번 나가 봐, 한 달 남았으니까, 혹시 알아? 갔는데 우승할지.”
대회라니! 관장님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깜짝 놀랐다. 링에 서 본 적도 없고, 아직 중고등학생에게 자세를 교정받는 초보 복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회라니, 거절 하면서도 가슴은 뛰고 있었다.
참가하지 않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무언가가 끓어 올랐다. 더 떨어질 바닥도 없었다.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시험해보고 싶었다. “대회에 나갈게요.”라고 하자 관장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신청서를 내밀었다. 정성 들여 이름을 쓰고 체급을 선택했다. 그날 이후로 특훈이 시작됐다. 이젠 실전이었다. 주로 남자 동생들과 훈련을 했다. 중학생, 고등학생이 내 상대였고, 동생들은 어렸지만, 주먹은 날카로웠다. 헤드기어를 써도 한 번만 맞으면 눈이 떠지지 않았다. '신청서를 괜히 썼나...' 후회하기도 했지만, 이미 제출하지 않았나. 이제 앞으로 가는 수 밖에 없다.
혼자 있을 때는 이미지트레이닝을 했다. 주먹이 날아온다고 상상하고 맞으면서도 머리를 들이댔다. 잽이나 스트라이크를 어떻게 피하고 카운트펀치를 날릴지도 생각했다. 자세는 낮추고 리듬을 타고 호흡을 뱉었다. 눈앞이 경기장이었다.
“얘들아 얼른 타라, 짐 잘 챙기고.”
대회 날, 관장님의 차를 타고 출발했다. 경기가 열리는 도장의 문을 여니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숨이 막혔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아직도 많이 부족한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기권할까?' 사람들을 보니 두려움이 커졌다. 관장님의 얼굴을 봤다. 관장님은 위 아래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냥 하라는 뜻이다. 어쩔 수 없다. 이왕 왔으니 무대에 한 번 서보는 거다.
“안녕하세요, 대회는 처음인데 사람이 정말 많네요. 출전하세요?”
“네, 00체급에 나가요.”
“아, 그러시구나, 복싱은 얼마나 하셨어요?”
“2년 조금 넘었습니다”
화장실에서 어떤 학생과 대화를 나눴다. 하필 나랑 같은 체급이라니. 숏컷을 한 그녀의 몸은 다부져 보였다. 복싱을 2년 넘게 했다는 말에 순간 기가 죽었다. '이놈의 오지랖, 괜히 물어봤다.' 밖에 나오니 함께 훈련했던 동생들이 보였다. ‘그래, 쫄지말자. 나도 그동안 매서운 훈련을 하지 않았는가.’
대진표가 나왔다. 여자는 체급별로 8강전을 치르게 되어있었다. 헤드기어를 끼고 링에 올라가면 도망갈 곳이 없다. 스파링에서는 3분 동안 모든 것을 쏟아 내야 한다. 상대는 나와 비슷한 실력이었다. 둘 다 맞으면 맞는 대로 피하면 피하는 대로 계속 팔을 뻗었다. 갑자기 스텝을 밟고 몸을 흔들어야 하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상대의 주먹을 계속 맞고 있었다. 긴장해서 다리가 얼어버렸다. 그 때, 관장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잽 해, 잽! 잽잽 스트라이크!” 첫날 배운 것이다. 잽잽 스트라이크. 갑자기 스파링 위가 다니던 도장 같이 느껴졌다. 상대의 눈을 보고 주먹을 맞아가며 잽잽 스트라이크를 날렸다. 움직이지 않는 팔을 정신력으로 뻗었다. 서로 힘이 빠져 있었다. 최대한 자세를 유지하며 쉴 새 없이 잽과 스트라이크를 날렸다.
“홍, 승!” 심판이 올린 손엔 내 손이 들려있었다. 땀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머리를 계속 맞아서 정신도 없었다. 그 와중에도 이겼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첫 승이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허허 잘했어, 다음에도 그렇게 하면 돼. 잽잽 스트라이크, 알았지?” 관장님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졌다. 긴장한 후라 다리가 풀렸고 통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숨을 쉬지 못해 한쪽 구석에서 쭈그려 앉아있었다. 물과 당을 보충하며 휴식을 취했다. 다행히 4강은 수월하게 이겼고 준결승전을 치를 차례였다.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준결승전 시작합니다!”
링에 올라서 상대의 눈을 마주 보며 깨달았다. 화장실에서 봤던 그 친구다. 2년을 다녔다는 말이 생각났다. ‘아직 1년도 안 된 내가 상대되겠어?’ 순간 의지가 꺾여버렸다. 시작도 하기 전에 정신력 싸움에서 졌다.
“청, 승!” 턱을 한 대 맞았는데 뇌가 흔들리는 경험을 했다. 몇 번 휘청거리니 게임이 끝나있었다. 졌다. 결승전에는 올라가 보지도 못하고 게임이 끝났다.
“허허, 괜찮아, 한 번 더 남았어. 아직 시합 끝난 거 아니니까 긴장 늦추지 마.” 3, 4위 전이 남아있었다. 죽기 살기로 정신력을 끌어모았다. 상대와 나는 힘이 빠져서 주먹을 뻗기보다 노려보는 시간이 많았다. 그래도 뻗었다. 세 번의 경기를 하고 나니 확실히 몸은 풀려있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한 번이라도 더 스트라이크를 뻗으려고 했고, 연습한 콤비네이션 기술을 사용했다. 나는 그 시합에서 이겼다.
체육관 한 구석에는 내 트로피가 놓여 있다. 경기가 끝나고 고깃집에서 실컷 고기를 먹었고 다음 날 도장에 나와 다시 몸을 풀었다. 그리고 얼마 후, 일을 시작하게 됐다. 복싱을 계속하고 싶었지만, 조금 더 안전한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장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함께 운동했던 친구들과 인사를 하고 도장을 나왔다.
복싱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정신력, 체력, 도전정신, 승부 근성까지. 복싱은 내 삶의 전환점이었다. 스트랩을 처음 감았던 날부터 대회에 출전할 때까지 짧은 기간이었지만 도전과 성공의 경험을 얻을 수 있었다. 팔이 천근만근이고 다리가 돌덩이 같아도 정신력으로 넘을 수 없는 벽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부터였다. 절대 포기하지 않으면, 꾸준히 도전하면, 뭐든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