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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조 Mar 01. 2024

10년 짝사랑이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언젠가 당신은 그를 사랑하지 않는 날이 올거야




나는 첫사랑에게 총 세 번 차였다. 한 사람에게 세 번이나 고백하다니! 참 징글징글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럴 수 밖에 없는 배경이 있다.


사람마다 첫사랑의 정의는 모두 다를 것이다. 대여섯살 당신의 입술을 훔친 아이가 첫사랑일 수도 있다. 델리스파이스의 가사처럼 중3을 넘긴 ‘겨우 160이 됐을 무렵’ 일어난 일일 수도 있겠다. 나의 경우는 좀 늦었다. 흠모의 감정은 어린 시절 다수 가져본 적이 있으나 지극히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느낀 것은 대학생이 되어서였다. 이 때의 감정은 압도적이어서인지 그전까지의 감정은 낯간지러운 수준으로 느껴질 정도다.


상대는 1살 위 미술전공자였다. ‘반하다’는 흔히들 영어로 ‘Crush on’을 쓰는데 이의 어원을 살펴보면 압도당하다는 뜻이 들었다. 나는 이미 첫눈에 그의 외모에 압도당했다. 그는 당시 인기있던 배우 공유와 닮아있었고 하얀 손으로 기타를 쳤다. 신중하게 말을 골라하는 모습에 호감이 갔고 어쩐지 내 말투와 닮아있는 그만의 독백도 싫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똑같이 좋아했다. 그가 한 마디 한 마디 말할 때마다 내 마음의 방어막들이 하나씩 벗겨졌다. 이제껏 만났던 사람들은 각기 다른 퍼즐 조각처럼 삐죽한 면이 엿보였는데 이 사람만은 달랐다. 마치 나와 똑같은 형틀에서 나온 사람처럼 보였다. 내 마음에 남아있던 마지막 빈틈에 부드럽게 맞아들어갈, 완벽한 퍼즐 조각처럼 느껴졌달까.



영화 <헤드윅>의 한 장면



저 사람은 나의 빈틈을 매워줄 사람일까?



나는 그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 고요히 감정을 곱씹었다. 잘생긴 사람이니까 후광효과가 있었을 것이고 모든 게 비슷하게 느껴졌을 수 있었다. 그래서 두근거리는 마음을 지하실에 밀어넣고 그대로 두었다. 하지만 그 감정은 일주일이 지나고 한달이 지나도 점점 커지기만 했다. 퍼석해지기는 커녕 발효가 되어 빵빵히 부풀어올랐다. 그로부터 두달쯤 지났을 때, 나는 그의 미니홈피에 하루종일 들락거렸다. 한숨만 쉬는 짝사랑 전문가가 되어버린 것이다.


1년 후. 친한 동생이 자신의 짝사랑 상대라고 가리킨 손끝에서 그를 다시 보았다. 동생의 마음이 상하지 않길 바랐기에 내 마음을 터놓지 않았다. 그저 잠잠히 감정을 내려놓고 동생의 속시끄러운 짝사랑놀이에 동참해줄 뿐이었다. 그러다 동생의 주선으로 그와 밥을 먹고 친해졌다. 동생은 아마 내가 윙맨으로 활약해줄 것으로 예상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동생의 적극성에 그는 정색하며 물러났고 옆에 선 나는 자꾸 무안해졌기 때문이다. 반면 그와 나는 단둘이 같이 지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같이 떡볶이를 먹고 공연을 보고 음반을 사모으면서 지냈다. 내가 뜨거운 감자의 신보를 미니홈피에 내걸자 그가 똑같이 자신의 BGM을 바꿔달았다. ‘역시 너는 음악 들을 줄 안다'는 그의 말이 좋았다. 그가 내가 오늘 서울 어디쯤 있을지 짐작하며 계속 연락해오자 직감적으로 알았다. 우리 둘은 너무 가까웠다.



아 지긋지긋한 싸이월드




한 달 동안 인도에서 지내며 그에 대한 감정을 다시금 되짚었다. 그리고 귀국길에 고백을 결심했다. 인도에 있는 나에게 ‘인도 근처에 산사태 뉴스가 났던데 괜찮니'라던가 ‘언제 오냐'는 메시지를 보낸 그였다. 하지만  충격적이게도 그가 다른 이와 사귀기 시작했다고 누군가 귀뜸해주었다. 나는 믿을 수 없어 안국역 구석에 앉아 전화를 걸었다. 그는 의외라는듯 내 전화를 받고 단박에 내 고백을 거절했다. 지금 만나는 사람이 있으니 그건 안되겠고 자신은 여지를 준 게 없다면서. 그날 나는 마음이 어디까지 내려앉을 수 있는지 알았다. 자꾸 새어나오는 눈물을 닦으며 집에 걸어갔다. 그만큼 노력했으면 됐다고 생각했다. 그래, 이렇게 첫사랑이 마무리 되었다면 참 좋았을테다.


그는 반년 후 다시 나를 찾았다. 사귀던 이와 헤어지고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카페에서 마주앉은 그가 중얼거렸다. 너와 다시 친구로 지내고 싶어. 우리 참 통하는 점이 많지 않아? 멍청한 단어의 행진이 계속되자 나는 짜증이 났다. 사귀지도 않았는데 재회하는 우스운 커플같았다. 감정을 들킨 이상 나는 이 사람에게 영원히 을일 것이다. 답이 정해진 게임일 것이다. 긴 통창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을 바라보며 나는 중얼거렸다.



“나는 비오는 날은 꼭 버스를 타. 버스 안에서 눈을 감고 있으면 빗소리가 파도 소리처럼 느껴지거든."








툭 던진 말에 그가 갑자기 말을 쏟아냈다. 비가 좋고 보라색이 좋고. 네가 없는 동안 미술 전시는 무엇을 보았고 여기는 그게 좋았어. 그는 혼자서 다닌 외로웠던 순간들을 나열했다.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는데.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그렇게 많았으면서. 너는 내가 필요하다는 말을 이렇게 하는구나. 나는 그의 얼굴을 한참을 바라봤다.


그렇게 나는 그와 다시 친구가 되었다. 전처럼 같이 콘서트를 가고 미술관을 갔다. 그가 값비싼 재즈 페스티벌에 가고 싶다는 말에 정성들여 라디오에 사연을 보냈던 기억. 내 글이 라디오 DJ의 목소리로 흘러나오고 즐거워했던 둘. 당첨된 티켓을 받아들고 세종문화회관에 뛰어갔던 순간들. 정재형의 피아노 독주를 들으며 감동했던 가을. 나와 그는 연인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명반입니다 이거



그때 친한 언니에게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그에 대한 애정이 차올라 다시금 고백을 고민하던 차였다. 언니가 말했다. 미안하다고. 너에게 참 미안하다고. 너 덕분에 가까워진 그와 곧 결혼한다는 말이 이어졌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 없어 언니에게 몇 번이고 되물었다. 아마 나의 고백이 임박한 것을 느낀 그가 언니에게 상황 설명을 부탁했을 것이다. 그 생각에 다다르니 세상이 회색빛으로 칠해지더니 아찔해졌다. 이건 상대에게 직접 차이는 것보다 더 아팠다. ‘예의도 없고 배려도 없구나.’, ‘내가 너에 대해서 잘못 알았다.’, ‘나는 사람보는 눈이 없어.’ 이런 생각에 휩싸여 어두컴컴한 아파트 놀이터에 한참을 앉아있었다. 나는 순진하고 멍청한 짝사랑을 그토록 오래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그렇고 그런 사람’이라는 나의 생각은 맞았다. 그로부터 5년쯤 지난 어느 여름. 그는 데이팅앱에 자신의 사진을 올려놓았다. 내가 아는 그의 사진들이 배열되어 있었고 자기 소개 역시 내가 아는 그였다. 그는 나에게 호감을 보냈고 나는 그를 수락해 물었다.


“결혼하신 분이 데이팅앱을 하면 안되는 거 아니에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신속하게 나를 차단했다. 나의 호감은 이렇게 세 번째 거절당했다.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수소문해보니 언니와 이혼을 한 모양이었다. 두 사람의 SNS에는 상대의 흔적이 깨끗하게 지워져있었다. 나는 그 순간을 끝으로 그를 향한 마음이 닫혀 마무리가 된 것을 깨달았다. 이것은 끝의 끝. 마침표였다.





"언젠가 당신은 그를 사랑하지 않는 날이 올거야."

베르나르는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겠지. 우린 또다시 고독해지고, 모든게 다 그래. 그냥 흘러간 1년의 세월이 있을 뿐이지."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여주인공 조제가 읊조린 구절이다. 마침내 그를 사랑하지 않는 날이 왔기에 이 글도 적을 수 있는 게 아닐까. 그의 이름조차 잊혀진 이 봄. 사랑이 지나간 자리엔 흘러간 시간만이 있다는 조제의 목소리가 쟁쟁하게 남는다. 시간은 흐르고 봄은 늘 다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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