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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화 Sep 14. 2024

12. 청명한 싱잉볼 소리

수현 (1)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20분 정도 지난 것 같습니다. 아니, 30분은 지난 것 같기도 합니다.


언제까지 앉아 있어야 하는 걸까요. 답답하기만 합니다. 주변에서는 아무 인기척도 들리지 않습니다. 큰일입니다. 벌써 다리에 피가 통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자세를 잘못 잡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 걸까요. 느닷없이 대머리 교수님을 따라 명상을 한다니. 눈을 감고 있자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듭니다. 불평과 불만도 절로 솟습니다. 내가 왜 오늘 처음 본 사람의 말을 따라야 하는 걸까요. 대체 박연호 선생님은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요. 앞에서 저를 보고 있을까요. 


마치 몰래카메라의 주인공처럼 제가 속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제 어리숙하고 이상한 행동들을 모두 관찰하면서 즐거워하지만 저는 그것도 모르고 꿋꿋이 자리에 앉아서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불쾌한 느낌이 간질간질 오릅니다. 동시에 다리가 심하게 저려옵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습니다. 몰래 오른쪽 다리의 위치를 바꿔봅니다. 조용한 명상홀 안으로 다리와 방석이 스치며 마찰음이 들립니다. 그 작은 소음에 저는 마치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마음이 조마조마합니다. 저리는 다리에 조금의 여유를 주자 오히려 저릿한 감각이 종아리를 휘감습니다. 송곳으로 찌르듯 따끔거리다가 얼얼하기까지 합니다.


제가 지금 잘하고 있는 것이 맞겠죠. 그나저나 갑자기 명상이라니, 무슨 일인지 어안이 벙벙합니다. 제가 속고 있든 아니든, 오늘은 우선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겠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언제 끝나는 것일까요. 청각이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아마 선생님이 침을 삼킨 듯합니다. 아직 제 앞에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참지 못하고 몰래 실눈을 떠봅니다. 선생님은 처음과 같이 평상 위에 앉아 눈을 감고 있습니다. 제가 눈을 뜬 것을 모르는 모양입니다. 그의 눈치를 보자 다리가 더 저려옵니다. 


이제는 안 되겠습니다. 헛기침을 하고 목소리를 냅니다.

“선생님, 몸을 움직이면 안 될까요?”


선생님은 눈도 뜨지 않고 답합니다.

“꼭 필요하다면 움직이셔도 괜찮습니다.”


저는 고민하다가 앉은 자세를 과감히 고칩니다. 이미 저린 종아리는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자세를 바꾸자 오히려 고통이 더 심합니다. 소리를 지를 뻔 했습니다. 저는 미간을 찌푸리며 슬쩍 선생님을 바라봅니다. 아주 평온한 얼굴입니다. 미소까지 지은 듯합니다. 저는 다시 눈을 감습니다. 복잡한 감정과 감각 사이를 쉼 없이 헤맵니다. 어서 이 시간이 끝나기만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곧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명상의 끝을 알릴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자, 김 선생님. 호흡에 집중하십시오.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고 내쉬십시오. 그때마다 코끝과 인중 위로 변하는 감각에 집중하십시오. 기민하고,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십시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천천히 호흡에 집중하도록 유도합니다. 들숨. 들숨과 함께 변화하는 코밑의 감각. 날숨. 날숨과 함께 변화하는 코밑의 감각. 시시각각 변하는 감각을 더욱 자세히 느껴볼 것을 요청합니다. 저는 눈을 감은 채 반은 포기하는 마음으로 선생님의 지도를 따릅니다.


들숨. 감각. 날숨. 감각. 다시 들숨. 종아리. 저릿한 고통. 종아리가 아파 호흡에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통증은 제 주의를 수시로 앗아갑니다. 선생님은 마치 제 상황을 다 아는 듯이 설명을 잇습니다. 


"몸 곳곳에서 드러나는 모든 감각까지 받아들이십시오. 그 가운데 호흡의 감각으로 돌아오십시오. 피부에서든 마음에서든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마땅히 자신의 것으로 삼으십시오. 있는 그대로 바라보십시오. 그것이면 됩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다른 곳으로 튀는 감각을 다시 코밑으로, 인중으로 되돌려오기를 주지합니다. 


"혹시 호흡으로 돌아오기 어려우시다면, 일부러 호흡을 크게 해보셔도 좋습니다."


박연호 선생님은 공기가 들어오고 나가는 감각을 위해 호흡을 몇 번 크게 시도할 것을 권합니다.


저는 그의 말을 따라 크게 숨을 쉬어 봅니다. 큰 들숨. 감각. 큰 날숨. 코밑에서 간지러운 느낌이 듭니다. 몇 번 더 크게 호흡하고, 다시 자연스러운 호흡을 되돌아옵니다. 선생님은 다시 호흡에 집중하도록 유도합니다. 저는 천천히 호흡합니다. 천천히. 깊고 깊은 호흡.




잠시 후, 싱잉볼의 소리가 울리고 명상홀 안으로 아스라이 사라집니다.


“오늘은 첫날이니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눈을 뜨고도 호흡의 반복이 뚜렷하게 느껴집니다. 머릿속은 멍한데 감각만은 생생합니다.


“김수현 선생님.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움직여 일어나셔서 아까 그 방으로 돌아오시면 됩니다. 저는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그는 명상홀의 중앙을 가로질러 나갑니다. 발걸음 소리가 뒤로 멀어집니다. 저는 약간 뻐근한 어깨를 돌립니다. 꼬인 다리를 천천히 풉니다. 디딜 수 없을 정도로 오른쪽 다리 전체가 저려옵니다. 곡소리가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습니다. 명상홀 뒤를 둘러보고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다리를 쭉 뻗어 부리나케 주무릅니다.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갖습니다.


감각이 정상적으로 돌아올 때까지 온전히 기다린 후에 몸을 일으켜 다시 작은 방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선생님에게 죄송하게도 시간이 많이 지난 듯합니다. 그는 가운데 탁자에 앉아 차를 우려 마시고 있습니다. 은은히 퍼지는 차의 향내가 좋습니다. 그는 제게 눈짓으로 가볍게 인사를 하더니, 찻주전자를 들어 잔에 차를 따릅니다. 제가 앉자 찻잔을 앞으로 내어주십니다.



“혈액순환에 좋은 차입니다.”


저는 그 말에 얼른 찻잔을 들어, 불어 마십니다. 맛과 향이 꽤나 좋습니다. 다시 한 모금 불어 마시면서, 속으로는 딴 생각에 잠깁니다. 선생님께는 실례했다며 다음에는 오지 않겠다고 말할 참입니다. 남편에게 더 자세히 물어보고 올 걸 그랬습니다. 막상 와보니, 글쎄요, 뭔가 속은 기분이 듭니다. 제가 생각한 도움은 이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차를 마시며 슬쩍 선생님의 눈치를 봅니다. 그는 명상을 할 때처럼 여전히 은미한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다시 오시라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


저는 속마음을 들킨 듯 깜짝 놀라 차에 입술이 데일 뻔했습니다.


“하지만 일단 찾아오셨다면, 불편한 생각은 삼가시고 몇 번 더 오셔서 명상 지도를 받으셨으면 합니다.”


“오늘과 비슷한 과정인가요?”


“네. 크게 다를 것은 없습니다.”


“죄송하지만, 조금 고민 해볼게요.”


“알겠습니다. 이곳에는 언제든 오셔도 좋지만, 미리 연락주시고 오시는 게 서로에게 좋습니다.”


“네, 그렇게 할게요.”


우리는 말없이 차를 마십니다. 창밖에서 다시 지저귀는 새소리가 들려옵니다.


“오늘은 첫날이니 나가실 때, 차로 모셔다 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답합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그냥 걸어 나갈게요.”


"네, 선생님께서 편하신 대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그럼 저는 이만. 천천히 차를 즐기시다가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오늘 나눈 말씀. 덕분에 재미있었습니다. 혹시나 제가 주제넘게 말한 부분이 있다면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십시오.”


저는 얼른 목례를 합니다. “아, 아니에요. 저도 수학 얘기 좋았어요.”



그가 가볍게 눈을 마주치고 사라집니다. 작은 방 안에 홀로 남습니다. 명상의 여운이 남아서 일까요. 호흡이 낯설기만 합니다. 호흡과 함께 배는 오르고 내립니다. 가슴도 저절로 부풀고 줄어듭니다. 하나하나 실지로 느껴집니다. 찻잔을 들자 온기가 손가락을 통해 전해집니다. 차를 한 모금 마십니다. 따듯한 기운이 다시 온몸에 퍼집니다.


기분이 이상합니다. 환경도, 상황도 생전 처음 경험하는 낯선 것들뿐인데 이상하리만치 차분해집니다. 혈액순환에 도움이 된다는 차 때문일까요. 모르겠습니다. 참 이상한 곳입니다. 차를 모두 마시자 졸음도 오는 듯합니다. 잠을 제대로 못 잔지도 며칠 됐습니다. 이만 집으로 돌아가서 잠을 자고 싶다는 생각만 듭니다.


건물을 나오자 상쾌한 공기가 전해집니다. 방 안에서는 잘만 들렸던 새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공원 어디서도 새가 보이지 않습니다. 덕분에 공원은 조용하고 한적하기만 합니다. 문득 공원을 좀 더 거닐다가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듭니다. 저는 오랜만에 찾아온 졸음과 한가한 산책 사이를 고민하다가 금세 공원의 출구에 닿았습니다.




키 큰 나무들을 뒤로하고 공원을 나오자마자 들려오는 소음에 놀랐습니다. 사뭇 경계심이 듭니다. 이런 적은 처음인 듯합니다. 저는 몸을 돌려 공원의 전경을 바라봅니다. 마음 공원의 울타리를 경계로 안과 밖이 서로 다른 세상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곳은 참으로 시끄러운 곳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끼며 잠시 깊은 숲속을 눈에 담습니다.





13. 깊숙한 곳에 자리한 얼음 _ 수현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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