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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화 Oct 05. 2024

25. 흰 장막

진영(3)





나는 잠깐 멍한 기운에 휩싸여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김태진 선생의 부인도 우주비행사였다. 학교를 떠난 날의 김태진 선생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부인에게 어떤 말을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무엇이라 말은 받아야겠다는 생각에 입을 뗐다.


“김태진 선생님은……”


“우주에서 실종됐어요. 죽었겠죠.”


명백한 나의 실수였다. 나는 낯이 뜨거워져 코와 입을 괜히 어루만지며 얼굴의 일부를 가렸다. 눈 주위를 손가락으로 꾹 누르다가 무겁게 입을 뗐다.


“죄송해요. 실수했습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는 억지스런 미소를 띠었다. “가까운 사이였나 봐요.”


가까운 사이. 


우리 사이가 실제로 가까웠더라도 어디까지나 과거의 일이었다. 그는 닿을 수 없는 아주 먼 곳에 있었다. 나는 짧게 고민하다가 답했다


“아, 예. 아마도.”


“김 비행사만 괜찮다면, 남편 얘기 좀 더 해줄래요? 남편에 대해 묻고 싶어서 고민만 했는데, 막상 꺼내고 나니 마음이 훨씬 편안하네요. 제가 운이 좋았어요. 이렇게 먼 곳에서 남편과 가까웠던 학생을 만나다니.”


박 비행사를 난생 처음 만났고, 심지어 방금까지만 해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가 김태진 선생의 부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친숙함이 갑작스레 깃들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나 지인은 없지만, 박 비행사의 정체를 알자마자 오르는 이 감정이 아마도 그와 비슷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박 비행사에게 남편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진정 옳은 일인지 숙고했다. 그의 마음도 대충 알겠다마는 괜히 옛날 얘기를 꺼내 부인을 곤란하게 만드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워 입을 떼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도 죽음만은 변하지 않아 누구에게나 어려운 법이었다.


하지만 박 비행사의 눈빛. 뭐랄까, 신뢰 가득하고 묵직한 눈빛이랄까.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좋으니 어서 입을 떼라는 눈빛, 목젖을 매큼하게 건드려 속 안에 있는 것을 뱉어내라는 눈빛이었다. 예상외로 강단 있는 모습이었다. 그가 진실로 바라는 듯했다. 나의 경솔한 실수를 만회하고 싶기도 했다. 그동안 갖가지 질문들 속에 남편에 대해 묻고 싶은 마음을 숨겼던 그가 안됐을 뿐더러, 그것도 모르고 쌀쌀맞게 대했던 내 태도가 미안스럽기도 했다.


나는 사관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말하면 좋을까. 


김태진 선생과의 일을 제대로 말하기 위해서는 내가 원래 얼마나 망나니 같은 인간이었는지 먼저 말할 필요가 있었다. 지난 일이었으므로 마음에 걸리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나의 대해 말한다는 건 낯부끄러운 일이었다. 얼마나 학교에서 자주 시비가 붙어 뒤에서 몰래 싸웠는지, 강의 중에 내가 얼마나 엉망이었는지 먼저 설명했다.그 다음에야 김태진 선생의 체력단련 단골 학생이었다는 말을 전할 수 있었다. 그 뒤를 이어 김 선생이 강의 중에 얼마나 엄격했는지도 빼놓지 않았다.



박 비행사는 차분한 표정으로 나의 말을 경청했다. 내가 말을 잠시 멈춰도 말을 뺐지 않았다. 나를 충분히 기다렸다. 내가 몇 번이나 말을 그치고 박 비행사에게 말을 넘기려 했지만, 자연스럽게 나의 이야기로 돌렸다. 그의 눈빛에는 집요함이 어려 있었다.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내게서 모조리 꺼내 들으려는 듯했다.


말도 잘하지 못할 뿐더러 일화도 점차 고갈됐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희끄무레한 빛이 기억 어딘가에서 자꾸만 언뜻거렸다. 생각나는 대로 말하면서도 흰 병실에서 선생과 나눈 대화의 장면이 가시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그 순간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기억이라는 건 별스러워서 기억하지 않으려 할수록 그때의 감정과 장면이 끈덕지게 마음 한 편에 자리를 잡고 만다. 마치 보건실의 흰 장막이 기억 여기저기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기다렸다는 듯이 슬쩍 펄럭이며 나타나는 듯했다. 나는 부리나케 다른 이야기에 몰두하려 애썼지만, 이상한데서 갑자기 그치기도 했고 전혀 관련 없는 기억으로 넘어가기도 했다.



이야기의 맥락은 진작 사라지고 말았다. 김태진 선생과 있었던 일을 샅샅이 헤집을수록 그 어디서나 흰 빛이 너울거렸다. 이야기는 이미 길을 잃었지만 기억은 매번 그 자리로 되돌아오는 것이었다. 벗어날 수는 없을까. 속으로 몰래 되뇌다가 말을 문득 그쳤다.


정적이 편안해질 때까지 박 비행사는 나를 기다렸다. 아주 긴 시간이었다. 대화를 그만두고 혼자서 쉬고도 싶었지만, 그와 나 사이에 알 수 없는 인력이 작용하는 듯 나는 자리에서 일어설 수 없었고 검은 우주도 한 패처럼 우리 사이에서 거대한 침묵을 지켰다. 모두가, 세상의 모든 것이 내가 입을 떼기만을 기다리는 듯했다.


정확히 무엇이 나를 부추겼을까. 박 비행사, 김태진 선생, 어른거리는 백색 물결, 검은 우주. 모르겠다. 결국에 나는 저항하지 못하고 입을 뗐다.


“저도 고아입니다. 김태진 선생님처럼.”


타인에게 나의 출생에 대해 직접 말하는 일이 처음이었다. 박 비행사는 표정의 변화 없이 조용하게 답했다.


“그랬군요. 힘들었겠어요.”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못한 채로 멀뚱히 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더위를 먹고 병상 위에 누운 채로 김태진 선생과 주고받았던 대화들, 그가 내게 건넨 위로의 말,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만이 전할 수 있는 조언, 조금이나마 나를 변화시킨 문장, 우주로의 첫발을 딛게 만든 동기.


비로소 맥락을 획득한 일련의 사건들을 박 비행사에게 직접 시인하자 그 순간이 생각보다 더 중요한 것처럼 실감되면서 두 가지가 동시에 떠올랐다.


첫 번째는 자살 계획. 두 번째는 김태진 부부의 징계.


모두 좋은 일은 아니었으므로 구태여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나는 아주 고된 체력단련 덕에 무사히 졸업할 수 있다는 농담 반 진담 반의 이야기로 서둘러 말을 끝맺었다. 차마 못다 한 이야기가 있었지만, 나는 할 말을 다했다고 느꼈다. 조금은 후련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이가 앞뒤가 꽉꽉 막힌 사람이어서요.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서 그렇게 달렸어요. 체력이 떨어지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요. 저한테도 운동하라고 얼마나 잔소리를 했는지 몰라요. 그런 거 보면 선생 일도 잘 맞는 것 같았는데, 만날 선생체질은 아니라는 소리만 하더라고요. 학교 얘기나 학생 얘기도 없었어요.”


나는 눈을 굴리다가 답했다.


“좋은 선생님이셨어요. 그분 덕에 저도 많이 바뀌었고요.”


우리는 그제야 식사를 천천히 이었다. 나는 부부의 생명줄 해제 사건을 모른 척 물었다.


“그럼 박 비행사님은 우주비행사로 계속 계셨던 거예요?”


“중간에 일이 있어서 잠깐 쉬었다가 다시 나왔어요.”


“힘드시지 않으세요? 마음만 먹으면 본부에 계실 수 있을 텐데요. 우주로 나올 젊은 우주비행사도 아직 있지 않아요?”


“말씀대로 본부에 남아 일할 수도 있는 나이죠. 이제는 우주비행사도 없는 사정인지라 간단히 신청서 하나 내니까 쉽게 우주로 보내줬어요. 그래도 이번에 들어가서는 좀 쉬려고요. 확실히 몸이 예전 같지 않아요. 금방 힘에 부쳐서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드네요. 이번에도 이렇게 민폐를 끼쳤고요……”


“탐사선 문제였잖아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래도 지구로 돌아가시면 좀 쉬는 게 좋겠네요.”


“지금 마음은 쉴 생각인데, 막상 돌아가면 또 몰라요. 계속 고민이 돼요. 지구에 있을 때는 우주비행사 상담센터에서 일했거든요. 거기서 몇 년 일했죠. 우주비행사들의 체력도 체력이지만 심리적인 문제도 무시 못 하잖아요. 이전의 우주비행사들의 영광도 한때여서 우주비행사뿐만 아니라 상담센터 일손도 부족한 실정이였죠. 아마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을 거예요."


박 비행사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옛날에는 우주로 나간다고 하면 전부 퍼줄 것처럼 세상이 움직였죠. 그때가 그리운 건 아니지만, 제가 우주로 나올 때만 해도 여전히 상황이 안 좋았어요. 다들 예전만치 관심이 없더라고요. 나갈 사람도 지킬 사람도 없어요.”


“지구에서도 그쪽에서 일하셨는데, 어쩌다 다시 나오신 거예요.”


그는 고민하는 눈치였는데, 그 묵언의 시간이 꽤나 길었다. 먼저 말을 빼앗아다가는 그 답을 듣지 못할 것 같아 덩달아 나도 말을 삼켰다.


박 비행사는 혼잣말처럼 입을 뗐다.


“남편 때문에요.”


나는 그의 짤막한 대답을 이해하지 못했다. 부인이 다시 우주로 나온 일과 김태진 선생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지 가늠할 수 없었지만, 또 그만큼 멀고도 복잡한 감정과 상황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 막연히 생각하며 우주선의 천정을 지그시 올려다보았다.





26. 우리가 찾는 것 _ 진영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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