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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화 Oct 10. 2024

27. 어두운 동공

수현(1)






저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칠흑같이 어두운 동공은 주변 회색조의 빛깔과 어렴풋하게 대비되어 그 형태를 겨우 가늠할 수 있습니다. 멀리 있는지, 가까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크기도 어림할 수가 없습니다. 집채만 한 동굴의 입구 같기도, 주먹도 겨우 들어갈 만큼 작은 구멍 같기도 합니다. 정확히 이유를 말할 수는 없지만 정체를 밝히고 싶은 생각만 듭니다. 저 동공은 무엇이기에 마음을 이끄는 것일까요.


저는 천천히 어둠으로 향합니다. 정말 이상합니다. 가까워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밀려나가는 기분입니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속상합니다. 조금 더 속도를 내어도 가까워지기는커녕 더 멀어지는 듯합니다. 하지만 저곳에 닿고 싶습니다. 그 바람뿐입니다. 갑자기 힘이 들고 어지럽습니다. 차가운 음료를 급히 마신 직후처럼 머리가 띵, 하게 아파옵니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습니다. 호흡이 흐트러지기 시작합니다. 검은 구멍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집니다. 갑자기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이번에도 끝내 명상에 집중하지 못하고 눈을 뜨고 맙니다. 저는 다시 눈을 감고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숨결의 감각을 느낍니다. 


들숨, 날숨, 간지러움, 흐릿함, 차가움, 따뜻함. 호흡의 변화에 주의를 기울여도 보이는 것은 없습니다. 감은 눈 뒤에서 눈동자를 굴리며 시각에 열중합니다. 눈을 감고도 볼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보았던 그 장면은 무엇이었을까요. 도저히 명상에 집중하지 못하겠습니다.


마침 싱잉볼이 울립니다. 벌써 1시간이 지났습니다. 눈을 뜹니다. 저는 여전히 연구실 바닥에 앉아 있습니다. 방석 위에서 몸을 천천히 풀기 시작합니다. 다리 마디마디가 저려옵니다. 발가락에서는 감각이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발을 힘껏 주무르며 목도 천천히 돌립니다. 일어나 방석을 정리하고 창가로 다가갑니다. 커튼을 치려다 그대로 둡니다. 눈을 감고 근원을 알 수 없는 눈물을 서둘러 닦아냅니다. 제 상태가 이상합니다. 혹시 섬망이라도 겪고 있는 것일까요.


명상을 시작한 지 벌써 4달도 더 지났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절박했기 때문에 하루에 서너 시간을 들여 명상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불쑥 떠오르는 성은이의 얼굴과 그에서 비롯된 우울감에서 벗어나기란 아직도 어렵습니다. 세상일이 마음먹은 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보고 싶습니다. 성은이가 정말이지 보고싶어요. 저는 서둘러 책상 위에 놓인 가족사진을 눈에 담습니다. 아이의 환한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처음 한 달 동안은 자리를 잡고 명상을 시작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성은이가 떠올랐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지도대로, 알아차리고 그저 바라보기 위해 매진했습니다. 떠오른 생각을 붙잡지도 않고 피하지도 않기 위해서요. 하지만 그것만큼은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모두가 압니다. 사람들도 그렇게 살아가지 않나요. 더 고민해봤자 해결되지도 않고, 심지어 한참이나 지난 사건을 아직까지도 후회하고 슬퍼하며 시간을 보냅니다. 그런데 누가 그 사람을 비난할 수 있을까요. 우리 모두가 비슷한 실수를 반복하며 살아가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마땅히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이 딱 한 명 있습니다. 맞습니다. 자기 자신입니다. 저도 제 자신을 매번 나무랐습니다. 이제 그만해 수현아, 너도 힘들잖아. 성은이를 놓아줘야지. 아직까지도 이러고 있으면 어떡해. 정신 차려 수현아.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탓할 수 없기에 그에게 유일한 권위가 생기고 맙니다. 그가 나를 이끌 수밖에 없는 겁니다.


명상 지도 후에 박연호 선생님을 봬야겠다는 생각을 두 번 했습니다. 한번은 명상을 시작한 지 1달쯤 지났을 때입니다. 예전보다 성은이가 더 자주 생각나 미칠 것 같았습니다. 그만큼 명상을 붙잡았지만 소용이 없는 것 같이 느껴질 때였습니다. 명상을 그만둘까 싶기도 했습니다. 남편은 말은 안 해도 날로 편안해지는 것처럼 보이는데, 저는 상태가 심각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제게 남은 방법은 없었습니다. 명상마저 저를 돕지 못한다면 도대체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혼란스럽고 두려웠습니다. 



고민 끝에 박 선생님께 연락을 드리고 면담을 신청했습니다. 선생님은 그날도 명상홀의 작은 옆방에서 차를 우리는 중이었습니다. 저는 차를 마시지도 않고 곧바로 제 상태를 급히 설명했습니다. 명상에 시간을 더 들이는데도 좋아지기는커녕 악화되고 있다. 예전보다 더 힘들다. 명상을 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저는 떼쓰는 아이처럼 쉴 새 없이 푸념을 늘어놓았습니다. 박 선생님은 알 듯 말 듯한 표정으로 제 이야기를 모두 듣고는 차를 천천히 한 모금 마시고 답했습니다.


“명상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많이 힘들어하십니다. 김 선생님과 비슷한 이유입니다.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버거운 상념들이 더 자주 찾아오는 것입니다. 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건 정상입니다. 김 선생님은 명상을 통해 정신의 기민함과 명료함을 회복하는 중입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것, 억압했던 기억들, 말도 안 되는 상상들을 비로소 마주하기 시작한 겁니다. 네, 처음에는 많이 힘드실 겁니다. 그것 또한 각자의 몫입니다. 자신 안의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대신 해결해줄 수는 없습니다. 그것들을 알아차리고 바라보십시오. 호흡을 느끼며 평정심을 유지하십시오.”


찾아온 보람이 없었습니다. 박 선생님은 매번 똑같은 말만 되풀이합니다. 같은 말로 모든 질문의 대답을 한다면 무슨 소용일까요. 제 기준에는 서로 다른 질문들이 그에게는 모두 같은 질문으로 들리는 걸까요. 우리가 쓰는 언어가 다른 걸까요. 서로의 생각이, 정의가, 소통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일까요.



박 선생님이 말을 이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다른 누구 때문에, 또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임하는 명상을 경계하십시오. 명상은 자기 자신에서 시작하고 끝나야만 합니다. 그리고 명상에 들이는 시간은 김 선생님 뜻입니다만,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점은 명상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비장하게 대할 필요도 없습니다. 마음을 편히 먹고, 때로는 즐기듯 명상하십시오. 이런 첨언이 조금 섣부를 수도 있겠습니다만, 김 선생님께서는 이해하실 것 같아 일찍이 전합니다.”


저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정곡이 찔린 듯 몰래 눈을 감습니다. 박 선생님의 말이 맞습니다.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 한 생각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것, 만사를 제쳐두고 골몰하는 것, 그건 제 버릇입니다. 연구자의 마음가짐이라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눈을 감고 호흡에 집중하는 일에서조차 저는 절박한 마음입니다.


이것도 제 잘못일까요. 아니요,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제 탓이 아닙니다. 세상의 탓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평범한 사람일 뿐입니다. 삶과 죽음, 감성과 이성을 초월하는 그런 인간이 아닙니다. 하지만 박 선생님은 마치 세상의 모든 아픔에서 벗어난 듯한 인간의 얼굴로 저를 바라봅니다. 그 시선이 왠지 불편합니다. 그래도 원망하지는 않기로 합니다. 박 선생님은 어디까지나 명상을 지도할 뿐이지 제 명상과는 무관합니다. 저는 누구도 제게 대신 전할 수 없는 명상 중의 자유로움을 떠올렸습니다. 박 선생님과의 면담은 아쉬움이 가득한 채로 마무리됐습니다.



그 후로도 명상 수행을 지속했습니다. 박 선생님과 면담을 하고 나서는, 기분 탓일지 모르겠지만 명상이 훨씬 수월했습니다. 평안함이 자주 깃들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순간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습니다. 의젓한 성은이 생각도, 차디찬 수학의 명제도, 명상을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지 않습니다. 시간이 아주 빠르게 흐르는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그 평온을 유지하려고 애쓰면 곧바로 제게서 멀어집니다. 그리고는 그 자리를 메우려는 듯 수많은 생각들이 홍수처럼 들이칩니다. 제 안에 온갖 것들로 가득차서 허덕이기 시작합니다. 숨쉬기 벅찰 만큼 다루기 힘든 감정과 장면들이 차오릅니다. 겨우 싱잉볼의 소리와 함께 명상을 끝내면 홀로 명상 경험을 되새겼습니다.


어둡고 고된 시간이 대부분이지만, 한편으로는 하늘의 별처럼 아주 잠깐씩 맛본 무상무념의 순간들을 기억하며 억지로 다행이라는 평가도 했습니다. 저를 속이고도 싶은 생각입니다. 이제 다 괜찮아졌다고, 다 잊었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속여 넘기고도 싶었습니다. 그런데 몸도 마음도 따라주지 않습니다. 눈을 감으나 뜨나 막막하기만 합니다. 앞으로도 거의 어디서나 어두울 것만 같습니다.



도움이 될까 싶어서 때때로 명상홀을 찾아가 사람들 속에서 명상하기도 했습니다. 처음 갔을 때가 생각납니다. 이미 시작 전에 도착해서 자리를 잡은 사람도 있었고, 역시 어디를 가나 지각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명상이 끝난 후 명상홀에서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만 항상 보았는데, 직접 그 사람들과 명상을 준비하니 저도 오래된 수행자 같았습니다.


저는 몰래 사람들을 관찰했습니다. 딱 보기에도 산속 깊은 곳에서 방금 내려오신 듯한 고귀한 분도 계시고, 예상외로 젊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목과 팔에 문신이 가득한 청년도 있습니다. 명상홀에 모인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에 신기하기도 합니다. 명상홀 앞쪽으로는 보통 수염이 긴 분들이 앉아 있어서, 저는 조용히 맨 뒤에 앉았습니다. 시간에 맞춰 박 선생님이 명상홀로 들어와 맨 앞에 앉았습니다.


면담할 때와는 다르게 공동 명상 시간의 박 선생님은 제가 감히 닿지 못할 아주 먼 곳에 앉아 있는 듯했습니다. 금세 싱잉볼이 울렸습니다. 명상홀에 여러 사람들과 함께 눈을 감고 앉아 있으니 기분이 묘했습니다.






28. 기억의 자리 _ 수현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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