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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화 Oct 12. 2024

28. 기억의 자리

수현(2)





저는 타인의 시선에서 굉장히 자유로운 사람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일찍이 연구자로 살아왔기 때문에 보통 혼자 시간을 보냈고, 주로 작은 공간에 홀로 앉아 있습니다. 수학에 몰입할 때에는 주변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오직 저만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항상 염두에 두었다가는 연구를 할 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한 번의 공동 명상만으로 제가 완전히 착각하며 살아왔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명상 중에 들려오는 토할 듯한 기침소리, 부스럭거리는 소리, 한숨 소리, 습관적으로 훌쩍이는 소리, 그 온갖 소음 가운데 눈을 감고 있으면 명상에 집중하려야 할 수가 없습니다. 


참지 못하고 먼저 박 선생님이 보내준 책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했습니다. 다행히도 관련 내용이 있었습니다. 소리를 소음으로 듣는 것도 제 자신이라고 합니다. 그 소리가 누군가에게는 그저 소리로 들리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거슬리는 소음으로 들린다고 합니다. 그 소리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각 개인에게 달린 것이랍니다.


수행을 통해 편견을 지우고 처음으로 돌아가, 있는 그대로의 새 소리로 들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소리는 단지 음이지, 원래부터 소음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어떤 문장을 암기하는 것만으로도 신통하게 깨달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떤 생각과 태도가 체현되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 듯합니다. 수학도 그렇고, 명상도 그렇습니다. 



저는 시간을 가지고 사람들의 소리를 마주했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정기적으로 명상을 수행하면서 소음이 아니라 음 그대로 듣는 순간도 종종 생겼습니다. 호흡에 집중하며 소리도 적응이 되자, 그 다음에는 내부의 시선이 저를 방해했습니다.


바로 옆에 앉은 삼십 명 남짓의 사람들의 시선. 그들도 역시 눈을 감고 명상에 집중하고 있겠지만, 마치 그들이 모두 눈을 뜨고 저만 쳐다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집니다. 몰래 눈을 뜨고 주변을 훑어보면 역시나 모두가 앞을 보고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저를 보는 시선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다시 눈을 감으면 또 다시 명상홀에 앉은 사람들이 제게 주목하는 듯한 기분에 빠져 집중하기 힘들었습니다.


두 달 정도 꾸준히 명상홀을 찾아간 덕분에 그 속에서도 평온한 순간을 발견했습니다. 특히 천정 중앙에 뚫린 창 위로 구름이 지나며 햇살이 들이치고 나갈 때, 그 순간에 감은 눈 뒤로 은근히 변하는 빛의 조도를 감지할 때, 그때만큼은 물속을 유영하듯 한없이 자유롭습니다. 왠지 모르게 그 햇빛이 제 온몸에 얽힌 사람들의 시선을 모조리 녹여 오롯이 홀로 있게 만드는 듯합니다.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순간입니다. 


명상 가운데 그런 순간들을 발견할 수 있기에, 힘들어도 지금껏 기대하며 명상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명상홀을 찾아가는 이유 중의 하나는 마음 공원이 마음에 들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실은 명상보다 숲속을 거닐고 싶어 찾아갈 때가 더 많았습니다. 가끔은 명상 시작 시간보다 더 일찍 와서 가보지 않은 길을 따라 공원 안으로 들어가는 날도 있습니다. 자주 찾아가다 보니 마음에 드는 장소도 생겼습니다.


공원으로 들자마자 오른쪽 길을 따라 올라가면 윤곽이 거의 흩어져 사라지고 흔적만 남은 길이 있습니다. 그곳은 다른 곳보다 나무가 울창하게 들어찼습니다. 하늘로 우뚝 솟은 나무의 기둥을 따라 고개를 들면 우듬지 근처의 나뭇잎들이 보입니다. 나무들은 명상홀의 앉은 사람들처럼 서로를 건드리지 않지만,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는 만큼 근접합니다. 그 사이로 흐릿하게 하늘의 일부가 보입니다.


햇빛이 들어 나무들의 사이가 환하게 드러납니다. 그 순간이 좋습니다. 나무들을 서로 구분하는 순간. 저는 명상에 집중할 때처럼 눈을 감기도 합니다. 언뜻 지나는 바람결, 간혹 멀리서 들려오는 새소리, 가을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요즘 들어 바람이 차가워지고 있습니다. 공원 안에 머물던 가을이 겨울에게 자리를 내어주려는 듯합니다. 나무들 사이에서 제 머리 위로 내리는 따스한 햇볕을 홀로 받고 있으면 성은이와 있었던 한 가지 일이 반복해서 떠오릅니다.



성은이는 겨울보다 여름을 더 좋아했습니다. 겨울 추위보다는 여름 더위를 더 잘 이겨내는 편이었습니다.


겨울이 오면 성은이의 손과 발이 가장 먼저 차가워졌습니다. 마치 딸애가 맨 처음 겨울을 움켜쥔 듯이 말입니다. 방에서 책도 읽고 그림도 그리며 놀다가도 제게 달려와 손이 시리다고 보챌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면 저는 그 손을 꼭 잡아줍니다. 그것도 부족한 것 같아서 제 품에 깊이 넣습니다. 그마저도 모자란 듯해서 성은이를 와락 안습니다. 약간 서늘한 기운이 도는 성은이를 안고 있으면 참 기분이 좋아집니다. 저도 겨울이 마음껏 좋아지려 했습니다. 


성은이는 제 품속에서 손과 몸을 녹이다가 꼭 묻습니다.


“엄마는 안 추워?”


“엄마? 엄마는 하나도 안 춥지.”


“이래도?”


딸애는 일부러 옷 속으로 차디찬 손을 넣습니다. 그때는 저도 모르게 약간 몸이 떨리기 마련입니다. 저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합니다.


“응. 그래도 엄마는 안 추워.”


성은이는 체념한 듯 완전히 제게 몸을 맡깁니다. 금세 아이에게 온기가 돕니다.


“엄마, 이제 나도 안 추워.”


저는 아쉬운 듯 말합니다. “그래서 갈 거야?”


성은이는 곤란한 표정입니다. 약간 주저하다가 어색하게 저를 안고 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이 귀여워 죽겠어서 잠시 데리고 있다가 옷을 한 겹 더 입히고 엉덩이를 토닥이며 마지못해 보내줍니다. 아이는 괜히 제 눈치를 슬쩍 보고는 방으로 들어가 앉아 또 무언가에 열중합니다.



성은이에게 엄마 품이 가장 마음에 드는 자리였기를 내심 바라봅니다. 제가 공원의 인적 드문 길을 찾아가고 기억하듯 성은이에게 한때라도 가끔씩 찾아오고 싶은 곳이었으면 하는 욕심을 내어봅니다. 성은이는 이런 제 마음을 알까요. 성은이가 곁에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이 엄마가 얼마나 힘든지 알까요. 맞네요. 차라리 모르는 편이 좋겠습니다. 힘든 일은 저만 알아도 좋으니 성은이는 행복한 일만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착실히 명상과 일상을 병행하면서도 박 선생님을 찾아갈 마음을 먹은 두 번째는 며칠 전의 일입니다.


얼마 전부터 명상 중에 어둡고 불안한 장면이 얼핏 지납니다. 명상이 끝나고 나서도 그 장면이 뇌리에 남아 저를 괴롭힙니다. 지금까지 명상 중에 오르는 장면들은 보통 과거의 기억이고 감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정확히 언제 일인지는 몰라도 그것이 제 것이라는 점은 확실했습니다.


하지만 캄캄한 구멍의 전경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과거에 겪은 일이 아닙니다. 적어도 제 기억에는 없는 장면입니다. 제가 다른 매체에 영향을 받은 걸까요. 모르겠습니다. 물론 명상을 할 때마다 어두운 구멍을 목격하지는 않습니다. 가끔씩 명상에 깊이 빠지는 순간에 일어납니다. 불길하기 짝이 없습니다. 악몽을 꾸고 일어난 기분입니다.



저는 혼자 끙끙대다가 남편에게 조심스레 이 명상 경험에 대해 고백했습니다. 믿지 못하는 눈치기도 했고, 전혀 알지 못하는 눈치기도 했습니다. 제 예상보다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았습니다. 글쎄요. 장면만 본다면 저도 동요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 장면과 함께 찾아오는 충동과 가슴 한 편이 아려오는 느낌까지는 저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는 꼴입니다.


저는 답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박 선생님께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명상홀 앞에서 박연호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인자한 미소를 띠며 가볍게 목을 숙입니다. 우리는 면담 공간으로 들어가 앉습니다. 선생님은 전기포트에 물을 덥히고는 차를 우릴 준비를 합니다. 저는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봅니다. 볼 때마다 느끼지만 아주 능수능란합니다.



그는 찻주전자와 찻잔에 더운 물을 따르고 잠시 기다립니다.


“김 선생님,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명상 중에 이상한 게 떠올랐어요.” 박 선생님은 표정의 변화가 없습니다. 저는 묻습니다. “더 말씀드려도 괜찮을까요?”


“네. 그러시지요.”


“딸아이 생각뿐만 아니라, 과거에 제가 저지른 잘못들이요.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창피한 순간들, 부끄러운 순간들, 그런 기억이 떠올라요. 아주 화끈거려서 마주하기 힘들지만 선생님 말씀대로 호흡과 함께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명상을 하고 있어요. 하루가 다르게 좋아지고 있는 것 같아요.”


“네, 잘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명상을 하면서 무서울 정도로 깊이 가라앉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숨도 막혀 와요. 그때마다 새카만 구멍이 보여요, 사실 구멍인지도 잘 모르겠어요.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저는 그곳으로 향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요. 그 마음을 먹을수록 더 멀어지기만 해요."



저는 말을 고르다가 다시 입을 뗍니다.


"저 너머에 무언가가 있는 것만 같은데, 다가가야 하는데, 그럴수록 저는 계속 멀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속이 얼어붙은 듯 먹먹하다가 왈칵 눈물이 나요. 이런 저를 이해할 수가 없어요.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되나요? 그 정체가 도대체 뭔가요? 아니, 그것보다 명상을 하면 이럴 수가 있나요? 제가 정상인가요?”


박 선생님은 찻주전자의 물을 개수그릇에 비우고 다시 뜨거운 물을 부으며 말합니다.


“제가 정상이라고 하면 정상으로, 비정상이라 하면 비정상으로 생각하시기로 마음을 정하셨습니까?”


저는 답하지 못한 채로 박 선생님이 넣는 찻잎을 물끄러미 내려다볼 뿐입니다.





29. Sitting low _ 수현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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